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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논단] 기억과 망각 그리고 선입견

2012-12-20기사 편집 2012-12-19 22:5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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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남 대전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같은 과 교수님 친구분 이야기이다. 어느 날 동창 모임을 하시는데 '솔아 솔아 푸른 솔아'라는 한정식 집을 예약하시고선 이렇게 문자를 돌리셨단다. '장소: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모임 당일. 다들 예약해둔 장소에 모이셨는데, 오신 분 중 반은 그러려니 하고 한 번 웃어주시고 오신 거고, 연락 돌리신 분 포함 나머지 반은 그때까지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셨단다.

뭐, 택시 기사님들은 예술의 전당을 가시면서 '전설의 고향'에 가자시는 60, 70대 분들이 하도 많아 이젠 되묻지도 않고 바로 예술의 전당으로 간다고 하던데…. 믿거나 말거나다.

우리의 선입견이란 게 참 재미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재주가 생기게 하고, 누구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하게도 한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참 대단하다. 매의 눈으로 단 한 번 스캔한 다음 평가를 마무리 짓고 그 결과를 저장해 둔다. 그래서 유독 기억력이 출중하신 분들은 늘 대하기가 어렵다. 한 번 찍히면 열 번을 잘해도 소용없고, 백 번쯤 잘해야 예전의 그 기억을 빼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천 번쯤 잘해야 좋은 사람으로 재편집되어 기억된다.

그래서 학문 중에서 가장 어려운 학문으로 '모시올로지'를 꼽나 보다. 모든 학문의 가장 기본이며 역사상 가장 오래된 학문이라고 한다. '모시는 행위'가 보다 체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학문을 뜻하는 '올로지'가 붙은 게 어원쯤 될까. 때론 '아부'로 폄하될 때도 있고 오해받을 때도 있지만,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나쁜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해 하는 노력들이 사람들 사이 관계를 아름답게 해주기도 할 듯하다.

생리학자들에 따르면 비교적 영구히 저장되는 장기기억은 뇌의 해마 부분에 다른 정보들과 함께 저장되었다가 훗날 적절한 힌트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끄집어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단다. 그런데 장기기억에서 정보를 꺼낼 때는 들어간 정보 그대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억들과 함께 서로 얽혀 재구성되어 나온다고 한다. 그렇게 재추론된 기억 속에서 어떤 사람은 뭘 하든 실수가 많은 사람으로, 또는 아주 미운털이 박힌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 난 내 기억 주머니가 남들과 다른 걸 거라 확신할 때가 있다. 그 주머닌 콩알만 해서 기억이란 게 아예 못 들어가고 튕겨 나오든지 아님 태평양 바다같이 넓어 그 속에 한 번 풍덩 하고 빠지면 다신 찾아낼 길이 없든지 해서 끄집어낼 기억이 아예 없어 황당하거나 끄집어내 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이 남다른 크기의 기억 주머니 덕택에 찾아와서 사과하는 사람을 보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이 사람이 나한테 뭘 잘못했지?' 유독 남편과의 말싸움에 불리해지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대개는 속 편하게 산다. 다른 사람과의 좋지 않은 지난날 기억 때문에 괘씸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아서 좋다. 학생들에 대한 선입견도 별로 없어서, 그냥 다 예쁘고 자랑스럽다.

이런 이유로 신은 인류에게 기억을 선물로 주시면서 함께 망각이라는 걸 보너스로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옛날의 부끄럽고 속상했던 기억들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속이 뒤틀릴 때가 있다. 그리고 참 감사하다. 매 순간 이렇게 괴로워하는 대신 내 기억 한 켠에 묻어둘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축복이지 싶다.

망각이 심하면 '건망증'이라 한다는데, 잊어버리긴 해도 건강한 상태란다. 그렇지만 좀 전에 썼던 물건을 다시 찾는 데 내 인생의 반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은 기억장애나 치매를 의심하며 우울해하게 된다. 끼고 있는 안경이나 통화하는 중에 핸드폰을 찾거나, 마우스 대신 핸드폰을 굴리는 정도는 애교 수준이란다. 부모님 친구분들 중에선 택시를 타면서 신발을 벗어 두고 탔다는 분, 무선 전화기가 안 보이면 바로 냉동실부터 찾는다는 분, 전자레인지에 데운 음식은 평생 못 먹는다는 분도 계신다.

아인슈타인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기차에서 승무원이 다가오자 표를 찾기 시작하는데, 그를 알아본 승무원이 됐다는 데도 계속 주머니를 뒤지고 있더란다. 계속 말리는 승무원에게 짜증을 내면서 "표를 찾아야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거 아니요"라고 했단다. 그의 어록들을 보면 그 역시 건망증은 있었지만 선입견은 없었던 듯하다.

12살 때까지 가지고 있던 우주의 질서에 대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든가, 상식이란 18세까지 얻어진 편견들의 집합체로 창조를 위해 배제해야 한다고 했단다. 선입견 없는 새로운 시각이 인류를 위한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글이 실릴 때쯤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나왔을 테지. 내가 지지했던 후보이건 아니었건 간에 선입견 없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켜보았으면 싶다. 그리고, 부디 내가 지지한 후보보다는 누가 되었건 잘할 수 있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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