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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논단] 독서행위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

2012-12-17기사 편집 2012-12-16 21: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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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중 충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학기 말이면 학생들에게 학기 중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할 수 있는 글쓰기 과제를 내곤 한다. 이번 학기도 학생들에게 과제를 받았다. '우리는 왜 신화를 읽는가'라는 주제의 글쓰기였는데, 많은 학생들이 내 수업을 듣기 전까지 신화는 단순히 픽션이며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원인은 물론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찾아야 하지만, 이론적으로 이것은 사고의 부재, 나아가서는 철학의 부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자아의 인식'이 결핍되어 있다는 얘기다.

'자아의 인식'이란 말은 대단히 철학적인 개념을 담고 있다. 쉽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결국 철학과 같은 형이상학적 물음뿐 아니라 삶의 행위 하나하나도 모두 '나'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한다는 말과 같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의 가장 기본적인 물음이다.

그런데 '나'를 인식하는 것은 내가 아닌 타자의 존재를 통해서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나'의 욕구와 능력과 의무란 '나'가 속한 세계의 사회적 제약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란 사유의 주체가 주변의 제약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유의 행위에는 무한한 자유가 있어야 한다. 관념 속에서만이 아닌 주변의 타자와의 비판적인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나'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은 이러한 자아의 크기를 키워주는 매력적인 성찰의 도구이다. 특히, 영미문학은 우리가 실재로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의 크기를 넓혀 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간단한 영미문학작품을 접했다 하더라도 '자아'를 사유하는 행위가 빠진다면 그것은 올바른 독서행위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작품을 읽고 "난 그 작품이 너무 좋았어", "난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라는 식의 반응 보였다면 반드시 그 좋았던 것, 아니면 말도 안 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줄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15, 16세기의 작품을 읽더라도 그것이 오늘날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반영이 될 때 진정한 의미의 '자아의 인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주제는 권선징악.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참고 착하게 살면 보상을 받는다는 얘기다. 단, 보상은 힘 있고 잘생긴 돈 많은 남자. 착하게만 살면 보상을 받는다는 듣기 좋은 주제는 결국 대단히 음험한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여인이여, 삶을 참고 착하게 살라. 그러면 그 대가로 돈 많고 잘 생긴 남자가 생길 것이니…. 남성우월주의의 사회에서 흔히 여성들에게 강요했던 인내와 체념을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와 말로 덮어씌우고 있다.

이번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드라마들을 생각해 보자. 많은 드라마가 신데렐라 플롯이나 그것이 약간 변형된 플롯을 따르고 있다. 과연 우리는 아직도 여성의 '착한' 삶의 보상이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라 믿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걸까. 우리의 딸들이 아직도 그런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플롯의 삶을 살기를 바라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런 플롯의 드라마는 성공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시청자의 심적 동의를 얻지 못하는 이야기는 채널 이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다름 아닌 드라마를 보는 것 그리고 문학 작품을 읽는 것과 자아에 대한 사유와 인식이 연결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조화로운 삶은 내가 나를 둘러싼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인식함으로써 가능하다. 타자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은 또한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다르게 생겼다고, 나와 다르게 생각한다고, 또는 나와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고 무시하거나 억압하려 드는 것은 실로 자신의 '자아'를 좁은 울타리에 가두는 셈이다. 문학을 읽는 것은 이렇듯 자신과 다른 타자를 이해하고 궁극에는 자신의 자아를 넓혀나가는 일이다. 문학 작품, 혹은 이야기가 있는 모든 예술 작품에는 최소한의 목적이 있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목적에 스스로 함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떤 작품의 메시지가 마음에 꼭 든다고, 혹은 진행되는 사건의 아름다움이나 충격에 매료되어 비판적인 시각을 거두어들일 때, 우리는 스스로의 자아를 거세한 채 '나'가 아닌 타자 속에 몰입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더 이상의 사유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타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는 자아에 대한 인식을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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