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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님'… 한국인 삶 깃든 언어·유교사상 씨앗

2012-12-11기사 편집 2012-12-10 2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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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충남의 말·교육

첨부사진1신교육제도가 보급된 1930년대 공립소학교에서 학생들이 체조를 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종교적 믿음이 없어도 새 생명을 갖는 아이들을 보면 '말(言)'이야 말로 인류가 갖는 초월적 능력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는 소리는 울음이다. 울음 자체도 자신을 나타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아기의 울음은 생후 2개월이 되면 쿠잉(cooing)이라는 '우우', '아하' 등의 모음으로 된 소리를 낸다. 쿠잉은 생후 5개월 부터 옹알이로 발전하는데 모음과 자음이 결합된 소리가 나온다. 그러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인간은 말을 통해 DNA 이상의 것을 전수했다. 바로 교육이다. 말로 전했던 구전(口傳)과 구술(口述)은 문자와 종이를 갖기 까지 오랜 기간 인간의 교육 방법이었다. 충남의 말과 교육을 함께 다뤄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충남인의 말=충남 사람들의 말투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언뜻 생각해도 다소 느리고, 여유롭다는 느낌이 강하다. 한반도에서 충남 사람의 말이 나뉜 것은 삼국시대 쯤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이전의 한반도 남부는 삼한말이라는게 국어학계의 정설이다. 마한과 변한, 진한의 세 하위 방언 구역에서 충남은 호서와 호남에 걸친 마한말을 바탕으로 했다.

마한이 망하고, 북방의 부여계인 백제가 한강 이남을 점령하면서 충남의 언어도 원주민의 마한어와 북방언어가 충돌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어 최고 권위자인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는 지난 1983년 출간된 책 '한국의 발견 - 충청남도'에서 충남이 행정구역으로는 한데 묶이더라도 방언으로 보면 차령산맥을 분계선으로 동남부 지역(현재의 서천군, 보령시, 부여군, 청양군, 공주시, 논산시, 세종시, 대전시, 금산군)과 서북부 지역으로 나뉘고, 다시 경기말에 휩쓸린 북부(아산시 서쪽, 천안시)와 그렇지 않은 남부(서산군, 당진시, 홍성군, 예산군, 아산시 서쪽)로 갈리는 3개의 핵 방언권을 이룬다고 했다.

말투에서 나타나는 충남말의 두드러진 특징은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것이다. '뿌리를 캬(캐어)', '장작을 퍄(패어)' 등이 그렇다. 또 '암먼유', '그람유', '왜유' 처럼 표준어의 '요'를 '유'로 발음하고, 말끝을 길게 끄는 것도 특징이다.

무언가 물어볼 때 '먹었깐디', '울었깐디' 처럼 '깐'이나 '깐디'가 쓰이고, 나이 어린 사람에 대한 의문형으로 '야'를 붙인 '누가 봐야', '좋다야', '먹지야' 등도 특이하다. 이밖에 '어디', '어떻게', '어째서', '얼마' 등을 '워디', '워치게', '워째서', '월매'처럼 말머리를 입술모양을 둥글게 오무려 내는 원순모음을 첨가하는 경향이 있다.

충남의 고대어 가운데는 알게 모르게 현대 한국인의 삶에 녹아든 귀중한 말들이 있다. 고대 백제 상류층이 왕을 지칭할 때 썼던 '어라하(於羅瑕)'는 현대 민요의 '어~라 만수'다. 해석하자면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라는 뜻이다. 어라하는 후기 백제어인 '니리므'로 대체되는데 백제어 '니리므'는 세월이 흐르면서 'ㄹ'과 'ㅡ'를 각각 잃고, '니임'이 됐다가 다시 축약돼 현대 한국어의 '님'이 됐다.

또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부여)는 '소부리(所夫里)'로 불렸는데 소부리는 '소불'로 축약되고, 현재의 '서울'이 된다. 신라의 '서라벌'이 '셔벌'이 됐다가 '서울'이 된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전기 백제의 수도가 한성임을 감안 할 때 '서울'은 분명 백제어, 다시말해 충남말인 셈이다. 소부리가 부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신라 경덕왕 때인 서기 757년이다.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들이 살던 도읍 '소불(서울)'이 집성촌 쯤으로 격하된 것이다. 이쯤 되면 충남은 '촌 동네'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소불'이기 때문이다.

◇충남의 교육=충남의 교육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기원과 맞닿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기록된 것만 더듬어 보면 충남의 교육은 고대 백제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사서(史書)들은 백제의 교육제도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중국의 주서(周書)나 북사(北史), 수서(隨書) 등의 '백제'편에는 '속중기사(俗重騎射)'나 '속상기사(俗尙騎射)'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혼인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말을 타고 습사(習射·활쏘기 연습)하거나 15세 이상의 나이가 되면 '학사어(學射御·활쏘기와 말하기를 배우는 것)'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기록들은 백제가 정치이념으로 유교를 채택했음을 보여준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유교 사상을 교육하는 학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당서(舊唐書)는 "백제에서는 오경(五經)과 제자(諸子), 역사(歷史)가 널리 읽히고 있다(其書籍有五經子史)"고 썼고,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백제기와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 백제의 역사책으로 여겨질만한 책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역사야 말로 교육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4세기 근초고왕(345~375) 시절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한 것도 당시 백제의 교육 수준을 짐작할만한 대목이다.

근초고왕은 아직기(阿直岐)와 박사 왕인(王仁)을 일본으로 보내 한문과 유학을 전했고, 왕인은 일본에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한 인물로 유명하다.

성왕(聖王) 시절에는 중국 양(梁)나라에 시경(詩經) 연구 전문가인 모시(毛詩)박사와 강례(講禮)박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백제의 교육 형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찍부터 백제가 도입한 유학은 고려와 조선을 관류하면서 선진 교육 시스템으로 정립된다. 백제가 학교교육을 실시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모시박사와 강례박사 등을 비추어 볼 때 박사제도를 도입했다고 할 수 있다. 박사는 중국의 오경박사나 고구려의 태학박사의 약칭으로 추정돼 백제도 유사한 교육기관이 있었음이 추정된다.

조선시대 학교는 관학으로 성균관, 서원과 사당 같은 사학, 향교를 비롯해 경연, 세자시강원, 종학, 잡학 등이 있었다. 공주와 부여 등 백제의 도읍을 둔 충남은 조선시대 기호유교의 발원지이자 개화지로 서원과 향교가 발달했다. 충남은 현재 공주향교, 은진향교 등 36개의 향교가 남아 있으며 서원은 화암서원, 돈암서원 등 41개 서원이 존재했다.

조선은 유학을 국시로 했기 때문에 교육도 유교적 이념의 실현을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참선비가 되기 위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됐다.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성균관은 고려시대 국자감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서와 오경 등을 기본으로 했다. 교육방법은 강독(講讀), 제술(製述), 서법(書法)으로 이뤄졌다. 성균관 내에는 오늘날 학생총회에 해당하는 재회(齋會)가 있을 만큼 사기를 진작하고 학자를 존중하는 기풍이 대단했다.

근대사회에 입문하자마자 조선시대의 전통 학교·교육제도는 개화와 함께 들어온 신교육제도로 설자리를 잃었다. 전통적인 향교, 서당교육이 사라지고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에 이르는 신교육이 시스템이 구축됐다. 1898년 공주사립소학교는 충남의 최초 공립소학교다.

기독교의 유입으로 학교 설립도 더욱 활발해졌지만 일제 시대에 접어들어 식민지형 교육제도가 구축됐다. 해방 이후 미 군정시기 현재와 유사한 교육시스템을 정립하고 현재 충남에는 세계화에 맞춘 인재양성에 힘쓰고 있다. 1400년 전 백제에서 찬란하게 꽃 피웠던 문명의 근본은 교육에서 나왔듯이 교육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책임질 중요한 분야중 하나다. 권성하 기자 nis-1@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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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조선말 서당에서 훈장이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