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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논단] 정치개혁의 포퓰리즘

2012-12-10기사 편집 2012-12-09 20: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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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숙 배재대 정치언론학과 교수

최근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의원정수 축소를 핵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안을 공동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의원정수 축소는 안철수 전 후보가 처음 제기하여 정치권과 학계의 뜨거운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안철수 사퇴 이후 잠시 소강상태였던 의원정수 축소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지난번에 안철수의 주장을 아마추어리즘이자 포퓰리즘으로 폄하하였던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그 주인공이다. 부유하는 안철수 지지층을 흡수하기 위한 양당의 정략적 시도이다.

그러나 이 정략적 시도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한국의 의원정수는 현재 300명이다. 안철수는 의원정수를 200명으로 줄이겠다고 주장함으로써 한국 유권자들의 정치 불신에 불을 댕겼다. 새누리당 안대희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은 최근 10% 감축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의원정수 축소나 확대는 민주주의적 대표성과 정치과정의 합리성 및 효율성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지 시장판에서 흥정하듯 처리될 문제가 아니다.

의회는 국민의 대표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행정 권력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도 적정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성숙한 민주주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OECD 국가에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의원정수는 절대 많은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은 의원 일인당 최소 2만에서 최대 약 17만 명의 인구 규모로 의원정수를 책정하고 있다. 30여 개 민주주의 국가 중 70% 이상이 의원 일인당 10만 명 이하의 규모로 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미국만이 유일하게 선진 민주국가들 중, 의원 일인당 인구가 70만 명가량으로 지극히 비정상적인 비율을 보여준다. 물론 멕시코, 브라질, 중국, 인도네시아 등 후진국들의 의원 일인당 인구 역시 수십만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는 국가 모델은 멕시코나 브라질이 아니지 않겠는가?

한국은 의원 일인당 인구가 약 16만 명 비율이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의원 일인당 평균 인구를 고려할 때 한국의 의원정수는 무려 572명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인구 규모 외에 GDP나 정부예산 규모, 관료제 규모 등이 유사한 국가들과 비교해도 한국의 적정 의원 수는 최소 300에서 400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의회의 약화는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민주주의적 통제를 더 약화시키고 권력구조를 더 폐쇄적으로 만들 것이다. 의회의 전문성을 떨어뜨리고 정치과정의 효율성을 더 떨어뜨릴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원정수 감축 주장은 그 현실화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그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반(反)정치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위험하다. 어쩌면 의원정수 감축은 일부에서 우려하고 있듯이 지역구 의원들의 강력한 반발과 내부 갈등 때문에 무산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의원정수 감축 주장은 혹자가 주장하듯이 진정성 없는 정치쇼일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열 몇 명 규모의 의원 감축은 의회정치 작동에 그렇게 심대한 영향을 안 미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의원정수 감축 논란이 심각한 이유는 그 주장이 한국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알량해 보이는 의회지만 그 의회의 도입을 위해 수십 년간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신체제하에서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임명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민의 손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한다는 민주주의의 지극히 단순한 규칙은 그렇게 당연하고 쉽게 지켜지지 않는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의 후발 민주주의 국가들 중 한국처럼 안정되게 민주주의 이행의 길을 걸어오고 있는 나라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정치에 보다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 정치의 문제는 정치의 축소를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일부 정치가들의 부패와 무능은 국민에서 의회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적 대표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이다. 국민이 선거를 통하여 제대로 된 정치인을 선출하고 이들 대표에 대한 시민사회의 통제와 감시가 원활히 이루어질 때 의회정치의 정상화는 이루어진다.

지금 정치권은 의원정수 감축, 기초의회 정당공천 폐지, 정당국고보조금 폐지 등 포퓰리즘 정치개혁 공약으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 의회와 정당을 약화시키면 정치부패는 척결될 것인가? 오히려 그나마 작동하던 체계와 구조가 붕괴하면서 온갖 종류의 편법과 사조직이 판을 칠 것이다. 한국 정치가 더욱 무능하고 부패하면 우리는 불만에 가득 차 의원정수를 더 줄여야 한다고 외칠 것인가? 그때 누군가는 의회와 정당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선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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