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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논단] 찬바람이 불어올 즈음에…

2012-11-22기사 편집 2012-11-21 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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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남 대전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10월의 마지막 날 이후로 5시만 되어도 스산하고 7시만 되어도 깜깜하다. 이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다.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건지. 허덕거리며 하루를 살고 나서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유체이탈 좀비가 되어 일어난다.

날이 밝아질 때쯤 되면 가출했던 정신이 마지못해 제자리로 돌아오고 그제사 깨어나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남들은 우아하고 여유 있게 사는 것 같은데 내 시간은 유독 빠르게 가는 듯하다. 특히 마른 땅에 빗물 같은 연휴나 1년을 벼르고 작정해서 가는 휴가는 더 빨리 가버린다. 그렇게 그렇게 따뜻한 날, 더운 날, 시원한 날, 추운 날 다 보내고 나면 어느덧 한 해가 지나가고, 10년이 금세 가고, 20년이 후딱 간다.

예전엔 마흔이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공자님이셨던가, 마흔을 불혹이라고.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 하셨다는데, 의욕은 30대 수준이고, 몸은 50대 수준인 듯 정체성이 없다. 생물학적 연령은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랑 같건만 그 얘기에 학생들이 빵 터져 버린 건 뭐지…? 그들은 디지털 방송에 50인치 스마트 TV에서도 저리 보이는데, 세월은 저들은 비껴가고 나만 관통했던 듯 얄밉다.

10대 여자애들에게 제일 부럽다 못해 얄밉기까지 한 친구는 얼굴도 예쁜데 공부까지 잘하는 것들이고, 20대 여자들에겐 성형수술 했는데 티도 하나 안 나고 예뻐서 남자들이 줄줄이 붙는 것들, 30대엔 결혼 전 별짓 다하다가 시집 잘 가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들이란다. 또, 40대 여자들에게는 맨날 골프나 치면서 놀 거 다 노는데 자식들 일류 대학에 척척 다 붙는 것들, 50대는 먹어도 살 안 찌는 것들, 60대는 건강도 타고났는데 돈복까지 타고난 것들이고, 70대는 자식들도 하나같이 효성이 지극한데, 남편까지 멀쩡히 살아서 호강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이 반전 있는 인생에 대한 부러움에는 나름 착실하고 충실히 살아온 자신의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억울함이 묻어 있다. 어쩜 나보다는 내 가족을 위해 야멸차게 살고 있지만 뭐 하나 맘같이 잘 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평범한 우리 엄마들의 한숨 섞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일찍 지는 해 때문일까. 해마다 이맘때쯤에는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는 주부들이 유독 많아진다고 한다. 대한우울·조울병학회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부 45%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고, 12.3%는 자살충동까지도 경험한다고 한다.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이름까지 따로 붙은 이 주부 우울증은 특히 40-50대 여성들에서 더 높다고 한다.

그동안 '가정'의 틀에 갇혀서 '가족'이라는 숙명과도 같은 사랑스런 짐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전력질주를 할 때도, 위태위태한 낭떠러지 사이로 목숨 건 곡예를 할 때도, 가파른 길을 힘겹게 힘겹게 올라가면서도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했는데…. 그러느라 팔뚝도 굵어지고, 목소리도 걸걸해져 이름도 성도 없는 '아줌마', '엄마'가 되어버렸는데…. 자식들은 다 컸다고 밖으로 돈다. 남편에게도 여자로보단 가족이나 부엌데기 내지 하숙집 아줌마로밖엔 안 보이나 보다. 그러면서 위한답시고 한마디씩들 한다. 왜 그렇게 사냐고. "엄마도 엄마 인생을 좀 즐겨~", "당신도 하다못해 봉사라도 다니지 그래?"

주부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어떤 사람은 쇼핑, 알코올, 도박에 빠지기도 하고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고 싶어 성형수술에 매달리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가족들의 인정을 받고 싶으면서도 그 해답을 밖에서만 찾으려 한다. 직장생활을 하는 일하는 주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찬바람 불어올 즈음엔 우리 엄마들을 돌아보자. 엄마의 얼굴에서 마치 세월을 '빨리 감기'라도 한 듯 어느새 늘어버린 주름살과 흰머리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독재자인 듯 센 척하지만 식구들의 말 한마디에 감동받는 마음만은 '꽃다운 여자'인 것을. 되감기 버튼으로 세월을 확 돌려드릴 순 없어도 일시정지 기능을 작동시켜 엄마의 까마득한 옛날 그 고운 미소를 되살려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오늘은 퇴근길에 엄마에게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아쉬울 땐 밤낮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찾으면서 일 없으면 연락도 않는 딸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동안 함께 달려온 주름살과 나잇살들에 너무 슬퍼하지 말자. 아마 한 10년만 지나면 오늘의 화장발에 버티고 있는 기미 덮인 피부도 그리워할 테지. 그러다 또 20년쯤 더 지나면 염색으로 해결되는 머리숱을 떠올리겠지. 찬바람에도 흔들리지 말자. 일조량이 줄어들면 멜라토닌 분비가 증가해 무력감이 오게 되고 세로토닌의 분비가 줄어들어 우울감이나 짜증이 심해질 수밖에 없단다. 그냥 생물학적인 현상이다. 이런 기분도 동장군님 오시면 없어지게 되어 있다.

끝으로, 80대 부러움의 대상자들은 '살아 있는 여자'란다.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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