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길먼 대-중소기업 상생① 제조업·벤처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상생은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이슈지만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여겨진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이 사회 계층 갈등과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출발점으로 손꼽히면서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충남지역에서도 대기업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납품단가를 현실화하지 못해 손해를 보거나 핵심 기술이 유출돼도 경제적 우위에 자리잡은 대기업에 문제제기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상생과는 거리가 먼 대기업의 횡포로 속앓이만 깊어지는 지역 중소기업 사례를 살펴봤다

◇납품단가 제값받기 힘들다=대기업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중소기업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납품단가 현실화와 관련된 것이다.

협력관계에서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는 대기업이 무리한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해 오더라도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경제적 불이익을 우려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원자재가격이나 인건비, 생산비 등의 인상분을 납품단가에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대기업에 자동차부품을 납품하는 A업체는 올 들어 원자재 가격이 20% 가량 상승했지만 이 상승분을 납품단가에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연간 납품단가를 이미 체결했다는 이유로 대기업 쪽에서 납품단가 조정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A업체 관계자는 "대기업의 의지 없이는 납품단가를 조정할 수 없기 때문에 갑자기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중소기업에 가중된다"며 "원자재값 뿐 아니라 매년 오르는 인건비나 전기요금 등 물가인상률을 납품단가에 반영하는 것도 어렵다"고 토로했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가 실시한 조사에서도 중소기업 84.3%가 지난해 보다 주요 원자재가격이 상승했다고 응답한 가운데 56.2%는 원자재 가격 인상분을 금년도 납품단가에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기업 중 30.9%는 `거래모기업의 가격인상 거부`를 그 이유로 들었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납품단가 후려치기`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법적으로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도 마련됐지만 중소기업은 피해사례를 고발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대전 소재 중소기업 관계자는 "철저한 을(乙)의 위치에 있는 중소기업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기업과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불공정행위를 고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며 "대다수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무리한 납품단가 인하요구나 납품거절, 부당반품 등에 의해 피해를 입으면서도 거래단절을 우려해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쉬쉬할 수 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기술·인력 유출에 몸살앓는 中企=중소기업의 핵심 기술력이 대기업으로 유출되는 것도 대·중소기업의 상생발전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다.

최근 중소기업청이 부설연구소를 보유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기술유출 실태를 조사한 결과 지난 해 12.5%의 중소기업이 기술유출을 경험했으며 건당 피해액은 평균 15억 8000만원에 달했다.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중심으로 중소벤처기업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 대전지역에서도 기술유출과 관련된 피해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유망 기술력을 기반으로 창업 5년차에 접어든 B업체도 창업초기부터 연구해 완성한 기술을 낮은 가격에 대기업에 넘겨주게 됐다. 해당 기술에 관심을 보이며 공동개발을 자처해온 대기업이 태도를 바꿔 이미 비슷한 기술을 개발한 상태라며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대덕이노폴리스벤처협회 관계자는 "탁월한 기술력을 보유한 중소벤처기업이라도 자금력과 홍보·마케팅 능력이 부족한 탓에 대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연구개발의 돌파구를 찾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핵심 기술과 관련된 소스를 얻고 나면 훨씬 훌륭한 인프라를 지닌 대기업의 개발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해당 중소기업은 기술을 개발하고 나서도 헐값에 빼앗겨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기술개발에 참여해온 핵심인력이 대기업으로 빠져나가는 `인력유출` 문제도 심각하다.

높은 연봉과 조건을 제시하는 대기업의 스카우트 공세로 인해 지역 중소기업의 핵심 인력이 유출되면 이는 곧 해당 기업의 핵심 기술력 유출로 직결된다. 지난 해 기술유출을 경험한 중소기업의 42.2%도 `핵심인력 스카우트`를 원인으로 꼽았다.

◇개선요구조차 못하는 중소기업 속앓이=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나 `기술·인력 빼가기`로 피해를 입은 지역 중소기업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이 같은 피해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피해 사례를 고발할 경우 대기업과의 거래에서 불이익을 경험할 것을 우려해 피해를 감수하고 거래를 유지하려는 중소기업이 많은 탓이다.

실제로 지난 4월 중기중앙회 대전충남지역본부는 지역 중소기업의 기술인력 유출 피해를 막기 위해 `기술인력 유출 신고센터`를 개설했지만 6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단 한건의 피해사례도 접수되지 않았다.

중소기업계에서는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나 인력 빼가기 등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원자재 가격의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 대기업의 불공정행위에 대한 법적 처벌규정 강화 등의 의견이 수년간 제기돼 왔지만 지지부진 했던 만큼 현실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대선을 앞두고 대기업의 불공정 관행을 막아 중소기업을 돕겠다는 말이 많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도와주는지 모르겠다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며 "진정한 대·중소기업 상생을 위해서는 생색내기식 접근방식보다 실질적인 법적 보호장치를 강화해 중소기업의 피해를 줄이고 대기업의 상생의지를 자극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예지 기자 yjkim@daejonilbo.com

■ 지역기업 모범사례

#한국타이어-반석

대전 유성구 탑립동에 자리잡은 반석(대표 유마영)은 타이어 성형드럼과 부품, 기계설비·장치 등 각종 산업기계를 설계·제작하는 기업이다. 2001년 설립된 후 기술력을 인정받은 반석은 한국타이어와의 상생을 통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발휘하며 `강소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국타이어와 오랜 기간 협력관계를 유지해오면서 지난해 133만 8000달러의 수출을 올리며 100만달러 수출탑 수상을 영예를 안은 것.

타이어 성형드럼은 내부에 들어가는 부품만 200여 개에 달할 정도로 복잡하고 정밀해 타이어의 품질까지 좌우하는데 이를 반석의 설계·제작 능력은 대기업조차 쉽게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이 한국타이어의 설명이다.

최근 반석은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헝가리와 인도네시아 등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지속적인 연구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반석 관계자는 "한국타이어와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전망도 밝다고 생각해 한국타이어가 진출한 국가에 적극적으로 해외 지사를 설립·운영하고 있다"며 "최근 기술력에 있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거리 차이가 점차 좁혀지면서 특정 부분은 중소기업이 개발하는 것이 더 낫다는 대기업의 판단과 이해가 있을 때 진정한 상생관계가 설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솔제지 대전공장-협력사(진영물류, 남단, 시테크, 신명)

한솔제지 대전공장(공장장 이창훈·대덕구 신일동)은 내부에 입주해있는 협력사들과 윈윈(Win-Win)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체 700여 명의 근로자 중 협력사 직원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운데 샤워시설 등 복지시설을 확충하고 매월 체육행사도 진행하는 등 단합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협력사 임직원과 함께 분기 마다 산업 재해를 줄이기 위한 안전 캠페인도 공동으로 실시한다.

최근에는 진영물류, 남단, 시테크, 신명 등 주요 협력사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동반성장 및 상생 협력을 위한 협약식을 진행했다.

대·중소기업의 상생협력을 통해 공정 하도급을 실천하고 근로자의 고용안정, 산업재해 예방 등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자는 취지였다.

한솔제지 대전공장 관계자는 "대전공장 내에서 많은 협력사 직원이 함께 일하고 있는 만큼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며 "상생이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한 점도 많지만 앞으로도 한솔제지와 협력사가 동반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코-한스코

대기업과의 성과공유제(Benifit Sharing)를 통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추게 된 중소기업도 있다. 대전 대덕구 문평동에 자리잡은 한스코(대표 정창근)는 롤초크와 메탈 베어링 등 제철설비에 들어가는 부품과 선박엔진 부품, 발전부품 등을 국내외 대기업에 공급하는 중견기업이다.

최근 한스코는 포스코와의 협력을 통해 철판을 얇게 만드는 롤초그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1년 간의 연구개발 성과로 탄생한 이 부품으로 한스코는 포스코와 5년 정도의 장기 계약을 체결했으며 포스코는 4억원 이상의 정비비 절감, 인력 소모 감소 등의 효과를 보게 됐다.

한스코가 탁월한 기술력을 갖추고 지난 해 584억원이라는 매출 성과를 올릴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1980년대 포스코와 거래를 시작하면서 부터라는 것이 한스코의 설명이다.

포스코가 2007년부터 협력사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성과공유제를 활용하면서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성과공유제를 통한 기술 개발에 성공하면 3-5년간 포스코로부터 안정적인 장기 수주를 할 수 있어 매출 증대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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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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