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도청 대전 이전 秘史

#1

1914년 3월 22일 대전-목포간 호남선 개통식. 충남도장관 박중양(朴重陽)이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귀엣말을 한다. "총독 각하. 공주는 너무 좁아 행정의 수부로는 불편함이 많습니다. 언젠가는 조치원이나 대전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소. 조치원보다 대전이 좋겠지." 데라우치의 대답에 박중양은 총독부에 정식으로 도청 이전을 건의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충남도청 대전시대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소식을 접한 공주시민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선다. 여기에 조치원 주민까지 가세하자 박중양은 고민에 빠진다. 충남도청 이전이 18년 뒤에나 이뤄진 것은 애초 조치원을 염두에 뒀던 박중양이 선뜻 대전 이전으로 기울지 못한 탓도 있다. 그 해 8월 1일 도(道), 부(府), 군(郡)의 관할구역 변경으로 충남에 속했던 평택이 경기도로 넘어간다. "도대체 도장관은 뭘 하길래 평택을 빼앗겼느냐"는 여론이 빗발친다. 도청 대전 이전 문제는 오랫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2

친일 거두 박중양이 역대 충청도 관찰사가 집무하던 선화당 건물 해체를 지시한다. 공주 지역 유지들은 일제히 반발했지만 결국 서슬 퍼런 도장관의 위세에 꺾였다. 선화당이 헐리던 날, 흉흉한 소문이 돈다. "건물이 뜯긴 자리에서 봉황이 날더니 뒷산 봉황산으로 날아갔다", "도장관이 괜히 선화당을 헐어 봉황을 놓쳤다", "봉황이 날아가 버려 공주의 기(氣)는 끝났다"는 등 유언비어가 퍼졌다. 충남도청 공주시대의 내리막은 이 때 예고된 셈이다. 공주 사람들은 뜯겨진 선화당 건물의 목재나 기왓장 하나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가 20년 세월이 흐른 뒤 1937년 옛 공주국립박물관을 세울 때 그대로 사용한다.

#3

1929년 3월. 조선 제 4대 총독 야마나시가 대전을 방문한다. 그날 밤, 유성 온천장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대전의 일본인 대표 시라이시 데쓰지로와 이케가미 정무총감이 도청의 대전 이전을 건의한다. 도청이 공주에 있어 충남 전체의 발전에 지장이 있고, 철길 하나 없는 공주는 금강 때문에 배로 물을 건너야 한다며 도청 이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야마나시 총독은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그 자리에서 온천장 주인이며 총독부 중추원 참의인 김갑순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청을 옮기려면 내각은 몰라도 의회가 말썽을 부릴 거요. 또 내년은 총독 30년을 기념하는 박람회가 개최될 예정인데 돈도 많이 들고…." 야마나시 총독의 말을 시라이시가 받아친다. "그건 문제 없습니다. 여기 김갑순 참의가 대전에 있는 개인토지를 도청 부지로 내놓겠다고 합니다. 건물 신축비는 들겠지만 부지 문제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국 의회도 왈가왈부하겠습니까?" 대한민국 제 1호 부동산 투기가 꿈틀거리는 순간이다.

#4

1930년 1월 17일. 제 5대 총독 사이토가 연두기자회견을 연다. "공주에 있는 충남도청을 금년 안에 대전으로 이전합니다. 필요한 예산으로 39만 5000원을 세웠으며 제국의회가 열리면 곧 의안으로 상정시켜 결정하겠습니다."

총독의 폭탄선언에 "대전으로 도청을 옮기는 이유가 뭔가", "공주의 반발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등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총독부는 "조선 지도를 펴 보면 대전은 교통의 중심지이며 조선 남부의 심장으로 개발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인구도 13년 전 6600명에서 지금은 공주보다 많은 2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공주는 다리 하나 없고, 철도 마저 없어 불편합니다. 부채를 부칠 때 꼭지를 잡아야지 부채살이나 가운데를 붙잡으면 바람이 나질 않아요. 대전은 그 부채의 꼭지가 될 겁니다"라고 설명한다. 총독부 발표에 대전과 공주 주민들은 희비가 엇갈린다. 도청 이전 발표에 대전 땅값은 평당 2-3원에서 5-6원으로 뛰었지만 공주의 집값과 땅값은 폭락했다. 당장 공주 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공주에 사는 일본인 거류민의 반발도 거세졌다.

#5

공주에서 조선인 6명, 일본인 20명으로 된 도청이전 반대투쟁위원회가 구성된다. 반대로 대전에서는 김갑순을 중심으로 도청 부지 확보와 공주에서 이전해 올 각급 기관의 땅을 마련하고 알선하는 `대전토지주식회사`가 발족한다. 이듬해인 1931년 3월 일본제국의회(하원)에 충남도청 이전 안이 상정된다. 공주에서는 반대투쟁위가 일본으로 극비리에 출국한다. 공주경찰서가 도일을 막기 위한 방해공작을 펼쳤지만 반투위는 도쿄에서 도청 이전 반대 청원 운동을 벌인다. 3월 9일 제59차 제국의회에서 조선총독부의 도청 이전 예산 39만 5000원을 전액 삭감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이전 안은 부결된다. 의회의 이전 안 부결은 예고된 일이었다. 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 149개 고교로 번지면서 5만 4000명이 참가했고, 대전에서는 대전중학교와 신흥국민학교 학생들이 가담했다. 공주에서는 공주고보(현 공주고)가 앞장서고, 조병옥 박사의 모교인 영명학교에서 항일 운동을 벌였다. 게다가 1931년 7월 전국적인 엄청난 폭우로 2657명이 사망하는 수재가 난다. 충남에서도 370명이 목숨을 잃고, 4211호의 집이 파손됐다. 총독부 재정 상황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도청 이전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6

도청이전 안이 부결되면서 도 단위 기관 유치를 위해 설립됐던 대전토지주식회사가 해산한다. 대전이 충격에 빠졌을 때 공주의 땅값이 요동친다. 한 때 3-4원 까지 내려 앉았던 것이 7-8원으로 뛰어 오른다. 대전 이전을 추진했던 사이토 총독은 귀족원(상원)을 움직여 깎인 예산을 되살리는 작전에 돌입한다. 귀족원에 친서를 보내 도청이전 안을 부활시키지 않으면 총독직을 사임할 것이며 이전 안 부결이 조선인들의 반대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북돋아 누구도 조선을 통치하게 되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을 한다. 결국 귀족원 제59차 본회의에서 하원에서 삭감한 도청이전 경비 전액이 부활된다. 또다시 공주와 대전의 표정이 바뀐다. 공주의 모든 상점은 실력행사에 나선다. 도청 관리나 경찰 가족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다. 그들은 조치원과 대전으로 나가서 물건을 사야 했다.

#7

7월 4일 우카키 가즈시게가 제6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다. 우카키는 부임과 함께 충남지사를 일본인 오카사키 데스로로 바꾼다. 오카사키는 총독에게 도청이전 반대를 수습하기 위해 금강철교 가설과 교육도시 건설을 주장한다. 금강대교는 대전으로 도청이 이전한 이듬해인 1933년 11월 완성되고, 허탈감에 빠져 있던 공주 주민들은 우람한 대로를 건너며 마음을 달랬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신청사 건설 등 도청이전은 착착 진행됐다. 문제는 이사였다. 공주 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 밤중에 실시된 이사는 험난했다. 아직 금강대교가 건설되기 전이어서 공주에서 유구, 반포, 유성을 지나 대전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가는 길목 마다 공주 주민들이 도로를 끊어 놓거나 바윗돌을 쌓아 이사에 애를 먹었다. 무엇보다 대형 철제금고를 옮기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일본에서 주문 제작한 금고는 당시 충남도의 명물이어서 공주군청에 두고 갈 수도 없었다. 금고는 현재 행정부지사실 옆 총무과 서무계(옛 의전실)에 있다.

#8

1932년 10월 1일 낮 12시. 도지사 일행이 대전에 도착하자 신청사에 팡파르가 울린다. "이제 충남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우여곡절과 진통을 겪었지만 대전이 갖는 지리적 여건은 도민들에게 큰 공헌을 할 것입니다." 우카키 총독의 축사는 대전의 운명적 발전과 궤를 같이 했다. 도청 이전으로 대전의 인구는 두 달 만에 2만 3374명으로 늘었다.

권성하 기자 nis-1@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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