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순 배재대 강사 국문학 박사

호서지역에는 예부터 삼대족(三大族)이란 칭호가 있었다. 연산김씨(連山金氏)·니산윤씨(尼山尹氏)·회덕송씨(懷德宋氏)가 바로 그들이다.(송시열, <회덕향안서>. "余惟湖西舊有三大族之稱, 蓋謂連山之金·尼山之尹·而其一則懷之我宋也") 오늘날 충청도가 양반고을로 크게 인식되는 것도 연산의 사계 김장생이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사사하고, 송시열·이유태·윤선거·권시 등 대유를 배출한 데 기인한다. 이들은 우리나라 기호성리학의 조종인 이이·성혼가와 학맥·혼맥으로 맺어져 하나의 견고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출(出)과 처(處), 사림(士林)과 사림(詞林)의 모습을 유지하며 관료생활과 향리생활을 병행하여 호서사족의 입지를 굳혔다.

호서지역이 기호유학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남성인물들이 외적으로 팽창되었다면, 여성들은 가정(家政)의 주체적 생산자로 내실을 다졌다. 사대부가 여성들은 치가(治家)에 전념하는 한편, 남은 힘을 독서와 창작활동을 통하여 여성 자신의 삶의 모습을 문학작품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호서지역에서 배출된 여성문인의 수와 작품의 양은 타 지역에 비하여 월등하다.

호서지역 여성문인의 작품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여성시인들 가운데 시문집이나 일기작품을 보유하였던 여성문인들만을 시기별로 살펴보아도 그 규모가 당당하다. 16세기 서천의 김임벽당(金林碧堂)·연기의 창령성씨(昌寧成氏), 16-7세기 천안의 이설봉(李雪峯), 17세기 공주의 남평조씨(南平曺氏)·홍성의 이옥재(李玉齋), 18세기 대전의 김호연재(金浩然齋)·서산의 오청취당(吳淸翠堂)·서천의 신부용당(申芙蓉堂)·청주의 임윤지당(任允摯堂)·조치원의 곽청창(郭晴窓), 19세기 제천의 강정일당(姜靜一堂)·청양의 기각(綺閣), 19-20세기 예산의 남정일헌(南貞一軒) 등이다.

이렇듯 호서지역의 여성문인 집중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는 이 점을 두 가지로 파악하고자 한다. 첫째는 여성문집의 발굴·번역·연구와 같은 노력이 진행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호서지역 사대부가에서 여성교육을 꾸준히 실행하였다는 점이다. 호서지역에 엘리트 여성들이 많았다는 것은 여성교육 수혜의 한 증거이다. 일부 여성들은 남성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경사(經史)·도가서(道家書)·시문집류들을 통독하였고, 각종 소설 등을 독서·필사하여 교양과 지적 수준을 고양시켰다. 어린 남녀 자손들의 공부는 여성의 몫이기도 하였다. 교육받은 여성이 교육의 주체로 자리매김되는 '가정 속의 교육자'로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호서지역 여성들의 면면한 문학 활동과 문집 발간 전통의 정신사는 어디에서 근원한 것인가? 첫째, 호서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한 정체성 정립을 위한 철학적 성찰의 결과이다. 호서지역 여성들은 타고난 자질은 높되 조선이라는 시대 속에서 자신들이 일구어 낼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시도하였다.

둘째, 기호성리학의 난숙·전개가 여성들의 학문적 사유에 동기부여하였다. 위에 거론된 여성들은 모두 기호학파 자장(磁場) 안에 있는 여성들이다. 이는 자연스레 혼맥으로 이어지면서 사상적으로 더욱 확고하게 뿌리 내렸다. 그리고 남성들의 학문적 발전과 성취는 여성들의 학문적 사유에도 커다란 동기가 부여되었다.

셋째, 고양된 선비문화와 가문별 여성에 대한 존모의식의 전통이 있다. 참 군자의 도(道)를 추구하도록 가르쳤던 어머니(여성)에 대한 기억과 숭모의식은 여성에 대한 존중으로 확대되었다.

넷째, 자연·인문지리적 영향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넉넉한 들녘. 사람들은 그곳에 살면서 온유돈후한 충청도 사람의 성정(性情)과 인심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호서지역 여성문인 배출의 전통을 만들어 낸 것으로 파악된다.

오늘날은 조선시대에 비한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여성도 당당히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하여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세상이 변해가는 속도에 비하여 여성에 대한 시각과 입지는 아직도 더디게 진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시대 충청도 지역에서 배출된 여성문인들을 본다. 열악한 환경에서 부딪치는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고독과 몸부림, 내면적 갈등과 고뇌를 아름답고도 처절한 슬픔으로 승화시킨 그녀들. 그 여성들에게 글쓰기는 삶의 치유과정이요 환상의 세계였다. 인고의 환경에서 품어낸 진주이기에 더욱 소중한 충청도 땅의 여성 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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