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경부장관 UN환경계획 한국부총재

안철수 교수가 드디어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오랫동안 뜸을 들이고 나온 결과였다. 대통령 출마를 할까 말까로 오랫동안 뜸을 들인 것인지 아니면 출마 시기를 저울질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떤 쪽으로 해석해도 정치를 대단히 공학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 여간 씁쓸하지가 않다. 국가 경영에 대한 참여를 깊은 고뇌의 산물이나 정치에 대한 열정으로서가 아니라 선거전략이라는 공학적 차원(political engineering)에서만 바라본 것 같아서 하는 얘기다.

"수심 2m의 수영장에서 수영할 줄 알면 태평양에서도 가능하다"라는 말로 그는 자신의 국정운영능력을 과시하였다. 500명 이상의 종업원이 있는 회사를 경영해 본 경험도 있다고 말하면서다. 과연 그럴까? 잔잔하면서도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편안한 수영장에서 수영할 때와 거친 파도와 상어가 우글거리는 망망대해에서 수영하는 것이 같을 수 있을까? 500명의 종업원을 다루어 보았다고 하여 5000만 명의 국민을 상대할 수 있다고 본 것도 걸맞지 않은 비유려니와 회사 경영이 국가 경영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여간 희화적이지 않다.

대통령이 헤쳐나가야 할 바다는 태평양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상대해야 할 국민은 주권자인 국민이지 일해서 노임을 받는 종업원이 아니다. 대통령이 경영해야 할 국가는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기업이 아니다. 국가는 역사적 존재요, 주권(主權) 수호의 주체다. 그 주권은 주식이 아니다. 양도하거나 매도할 수 없는 국민의 생명 그 자체다. 인류가 갖는 보편적 가치를 지구적으로 구현해 나가야 하는 실천적 주체이기도 하다. 그의 정치관이 너무 단견적이고 근시안적이 아닌가 해서 여간 실망스럽지 않다.

미국의 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그 직에서 물러난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국제분쟁 해소와 인권보호 내지는 질병과 기아의 퇴치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집 없는 사람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일에 앞장섰다.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이 청바지를 입고 지붕에 올라 못을 입에 물고 망치질을 하는 모습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봉사자의 자세였다.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 가난하고 헐벗은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수많은 저술활동을 하면서 세계평화를 위한 행보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공로로 그는 2002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카터가 재야에서의 성공적인 업적과는 대조적으로 재임 중에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안철수 교수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카터도 지금의 안철수처럼 대통령에 입후보한 이후 줄곧 기성 정치인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신을 워싱턴의 '아웃사이더'로 자처하였다. 그는 오직 평범한 시민들의 대표일 뿐임을 강조하였다. "나는 변호사도 아닙니다. 나는 의회의원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에서 일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정직성을 호소하였다. 선거전에서도 이기기 위해 거짓이나 사술을 쓸 생각이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자신의 순진함을 과시하였다.

카터의 그러한 전략은 '닉슨이 몰고 온 위선과 술수, 기만과 거짓'에 식상한 당시의 미국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순진한 듯한 웃음과 절대로 거짓은 없다는 약속에 국민들은 환상적인 메시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환상은 곧 그의 백악관 입성과 동시에 깨지고 말았다. 그에게는 확고한 정책적 지표도 없었고 정치적 후원세력도 없었다. 자신의 소속정당인 민주당의 간부들로부터도 협조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경험도 없는 조지아 마피아집단에만 의존하면서 정책을 입안하였다. 각종 이익단체와의 조화도 꾀하지 못해 일어난 서투름과 부적절의 결과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럴드 포드가 임기 중 2년간을 의회 안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보냈다면 카터는 자신이 제출한 안건들이 의회로부터 거부당하면서 자신의 임기 대부분을 허비했다"는 혹평까지 받고 있다. 임기 마지막에 미국인 53명에 대한 이란인들의 인질사태를 맞아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책임도 카터의 실패작으로 남아 있다.

카터의 이러한 실패를 오늘의 안철수 교수가 반면교사로 삼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다. 바다는 결코 수영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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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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