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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담청론] 17세기 여성CEO 남평조씨

2012-09-04기사 편집 2012-09-03 21: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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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순 배재대 강사 국문학 박사

남평조씨(南平曺氏, 1574-1645)는 춘성부원군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부인으로 '병자일기'의 저자이다. '병자일기'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황급히 피란길에 오르기 시작한 1636년(병자) 12월부터, 피란생활을 마치고 서울 본가로 돌아가 생활한 1640년(경진) 8월까지 3년 9개월의 나날을 기록한 한글일기이다. '병자일기'는 남한산성에 머물고 있는 남편 남이웅으로부터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짐붙이는 생각도 말고 낮밤을 가리지 말로 빨리 청풍으로 가라"는 화급한 편지로 시작된다. 남평조씨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양식을 담은 쌀궤 하나를 가지고 출발하였으나, 그마저도 도로에서 묻어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이 되었다.

'병자일기'에는 남평조씨가 서울을 출발하여 경기도 화성→진위→평택→충남 신창→당진→서산→홍성→죽도→당진 신평→예산 대흥→청양→전북 여산→유성→충주→월탄→여주→서울로 돌아가기까지 전쟁을 피하여 이곳저곳 피란처를 바꾸며 겪는 노년기 양반 여성의 고난의 여정이 섬세한 정감으로 묘사되어 있다. 남편 남이웅은 세자를 시종하여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 있었던 상황이다.

'병자일기'에 기록된 남평조씨의 일상은 가정(家政)의 주체자(主體者)로서 인간경영자로서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남평조씨는 제사·선물수수관리·농사운영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피란여정기에도 매월 두세 차례 이상 제사와 차례를 지냈다. 제사는 친정 쪽 부모와 조부모·시부모·시양부모·시양조부모·시증조부모·아들·며느리, 차례는 정월 초하루·삼짇날·단오·유두·추석·동지 등 빠짐없이 지냈고, 죽은 사람들의 생일날에도 생일다례를 차렸다.

남평조씨 집안의 가계운영의 수입원은 전국에 분포한 토지의 소출과 들어오는 선물에 의존도가 높았다. 수많은 노비(남평조씨 소유 토지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고, 그 토지를 관리하는 노비의 숫자도 200명이 넘었다)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손님 접대를 위해 농사운영은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경제행위였고, 그 운영의 주체자는 남평조씨였다. '병자일기'는 농사일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농사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하였다.

다음으로, 인간경영자로서의 모습이다. 1638년(무인) 2월 3일 일기에 "어디로 가나 난리 중이지마는 우리에게는 이상하게도 먹을 사람이나 왕래인들이 모여드니 신기한 일이다"라고 기술하였는데, "손님들이 종일 와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고도 하였다. 이렇듯 남평조씨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남평조씨는 인간경영자의 측면에서 따뜻한 감성을 지닌 휴머니즘의 소유자로 파악된다. 그 한 예로 노비와의 관계형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병자호란 중에 노비들은 모진 상전을 피하여 달아나거나 숨은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남평조씨의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외방 노비들은 도망은커녕 죽은 이 없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을 '항것(상전)' 덕분으로 돌리며 감사해하였던 것이다. 1637년(정축) 11월 10일 일기에 의하면, 남평조씨의 솔거노비 창원이 수공 차 부안에 갔다가 호남과 영남에 거주하는 종들을 방문하였다. 이때 영·호남의 종들은 창원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상전 덕분에 다 살아남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남의 집 사람들(종)은 달아나거나 숨은 이가 많은데, 그 이유가 '상전이 종들을 심하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병자일기'에는 단 한 차례도 도망간 노비의 사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없을 뿐만 아니라 남평조씨도 피란 여정에서 노비들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남평조씨는 "그래도 벗지 않고 얼고 데지 아니하니 모두 종들이 아니었으면 어찌 되었으리?"라고 말하였다. 종들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해하였던 것이다. "종의 집에 몸을 의탁하여 마음이 편안하고, 어디를 가도 종이라는 것이 우연치가 않다"는 고백은 남평조씨의 종을 대하는 철학이 묻어 있다. 부리는 사람인 남평조씨와 부림을 당하는 종의 관계가 주종관계를 넘어 상호의존적 관계임을 살필 수 있다. 노비는 남평조씨 가문의 운명 공동체이면서 재산이기도 하다. 중소기업을 방불케 하는 200명이 넘는 노비와 전국분포의 농토경영. 끊임없이 찾아오는 남편의 지인과 객들의 대접. 죽은 가족들에 대한 기억과 제사. 남평조씨의 하루는 그야말로 물샐틈없는 스케줄 속에서 운영되었다.

전통시대 대부분의 여성의 삶이 가정 내 '소극적 내조자(消極的內助者)'로서 존재했을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 너머에 남평조씨가 있다.

17세기 '병자일기' 3년 9개월의 기록에서 만난 남평조씨의 인격과 이타적 인간경영은, 오늘날 이기적 잣대에 의해서 움직이는 우리의 인간관계 형성에 하나의 교훈을 제시해 주는 바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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