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byun806@daejonilbo.com

# 흙 길을 닦기 시작했다. 둘레길이란 이름의 걷기에 맞춤한 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지자체마다 작고 호젓한 아름다운 길을 경쟁하듯 만들었다. 도시마다 명품 둘레길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그래도 길 닦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둘레길은 산업화를 선도했던 도로와는 딴판이다. 산을 깎고, 숲을 까뭉개고, 마을을 두동강내서 만든 길이 아니다. 곧고 넓은, 속도가 경쟁력인 길은 더욱 아니다. 지금은 사라진 마실 가던 길, 땔나무 하러 가던 길, 장 보러 가던 길, 학교 가던 길 등이 인적이 끊기면서 푸서리 길이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길 이름도 두멧 길, 황톳길, 도붓 길 등 정겨움이 넘쳐난다. 옛사람이 걸었던 작은 길을 찾아내 먼지를 쓸어내고 온전히 사람만 걷는 친환경 길이다. 고을과 산하를 들추고 옛 얘기를 찾아내 스토리텔링의 표지판까지 설치하고 유적들을 복원해 놓아 친절한 길 동무가 되고 있다.

# 옛 길 복원은 걷기의 재발견이다. 걷기 대회, 걷기 여행, 걷기 학회, 걷기 운동본부 등 걷기 열풍과 함께 생경한 용어들도 생겨났다. 둘레길 등장으로 걷는 인구도 부쩍 늘었다. 지역의 명품 둘레길을 마치 전문 산악인이 에베레스트를 오르듯 순서를 정해서 정복하는 마니아까지 생겨났다.

전국의 둘레길마다 걷기 대열에 인파로 북적인다. 둘레길 걷기가 트랜드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길손이 돼 두런 두런 대화를 하면서 걷는 모습은 한 폭의 풍속화다. 예스럽게 정비된 길은 타임머신을 타고 몇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 속 길을 걷는 것 같다. 논둑길, 마을 안길, 오솔길을 번갈라 가며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로지 수직으로만 걷던 길을 수평으로 걷다 보면 정상에서 보지 못했던 숲의 속살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길손이 넘쳐나면서 길가에는 현대판 주막과 쉼터가 하나 둘 자리를 잡으면서 운치 있는 길의 문화가 움을 틔우고 있다.

# 옛 사람은 건강 때문에 걷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즘의 걷기 열풍의 원인은 단연 건강이다. 걷기는 기름진 음식과 운동부족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뱃살을 줄이고, 찌든 마음의 기름때도 태워 없앤다. 걷기는 함께여도 좋지만 정신건강과 내면의 카타르시스를 원한다면 혼자가 제 맛이다. 혼자 걷다 보면 사색 속으로 빨려 들어 간다. 사색은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한다. 보이지 않던 것, 지나쳐 버렸던 과거의 일들을 새롭게 볼 수 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치게 했던 다툼도 하잘 것 없는 일이 되고, 그 자리에 너그러움이 자리한다. 미움, 슬픔, 증오, 분노의 감정도 눈 녹듯 사라지고 용서와 후회와 참회만 남는다. 걷기는 비움이고 세파에 상처난 마음 곳곳을 치유하는 카타르시스 행위다. 걷기는 자기 수양이다. 걷는 발자국마다 비움이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 길섶에는 삶의 철학이 스며있기에 많은 문인들이 길 예찬을 했나보다. 정호승의 '봄길'은 다른 사람이 걸어갈 길을 개척하는 희생정신이 깃들어 있고, 신경림의 '길'은 자신이 걸어온 인생 길을 성찰함과 동시에 앞으로 걸어갈 길을 일깨워 준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애틋한 여운이 남는다.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은 해탈 즉 깨달ㅂ음의 경지를 웅변한다.

안소니 퀸 주연의 1954년 작 아탈리아 영화 '길(La Strada)'의 압권인 애수어린 트럼팻 연주는 지금은 죽고 없는, 한때 조수였던 여인의 맑고 순수한 영혼의 울림이다.

길은 문학작품과 영화의 소재가 되면서 의미가 확장된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의미의 길이 되고 과거에는 접하지 못했던 인생의 좌표가 돼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 감미료 같은 존재다.

# 방학이자 휴가철이다. 숲으로 난 둘레길을 따라 여름 속으로 들어가보자.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마음 속 대화로 소통하면 가슴가득 사랑과 행복이 채워질 것이다. 타박타박 걷다 보면 계곡의 폭포소리도 들리고, 넉넉한 그늘을 선뜻 내주는 노거수도 만난다. 설령 그 길이 불편하고 힘들지라도 걱정 근심을 내려놓는 비움의 길이니 마음은 한결 개운하다. 그리고 길에서 자문자답으로 길을 물어보자. 사랑·출세·행복의 길을…. 그러면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림으로 대답할 것이다.

걷기 여행은 대전일보가 충청 명품 둘레길을 집대성한 '길'이 안내해줄 것이다. 숙박은 물론 지역 곳곳의 명품 맛 집까지 소개해주니 여름 휴가길 길잡이로서는 금상첨화(錦上添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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