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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담청론] 명재 선생이 읊은 귀거래사

2012-06-26기사 편집 2012-06-25 21:5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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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순 배재대 강사 국문학 박사

첨부사진1윤증선생이 시집 간 딸에게 보낸 편지 원본.
'너무나 심난하여 긴 사연 못 쓴다/ 그 사이 눈이 내려 추운데 잘 있고 모두들 잘 계시고/ 교동 소식 또 들었느냐?/ 나는 (집을) 떠난 지 이레 만에 간신히 들어와 큰 탈 없고/ 아버님 기후 일양하시고 각처 다 무탈하니 다행하고/ 용남이가 그 사이 죽었으니 참혹한 모양 측량 못 할밖에/ 내 신세 괴이하다/ 차마 제 어미 모양을 도무지 보기 슬프고 견딜 수 없어/ 훌쩍 어디로 가고 싶으나 그도 할 수 없고 답답하다(중략).'

이 편지는 명재 윤증(1629-1714) 선생이 1685년(을축, 숙종 11년) 선생의 나이 57세 때 시집간 딸에게 보낸 편지이다. 윤증 선생은 탄옹 권시(1604-1672) 선생의 딸과 혼인하여 1녀 임진영(任震英) 부인과 2남 행교(行敎)·충교(忠敎)를 낳았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친정아버지 명재 선생은 딸에게 너무도 심란한 자신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엄동설한에 집을 떠나 있는 처지에서 친가 노성 교동의 소식 여부, 아명(兒名)으로 추측되는 용남이라는 인물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입고 늙은 아비의 괴이한 신세와 슬픔을 써 내려갔다.

명재 선생은 병자·정축년(1636~1637) 호란(胡亂)이 할퀴고 간 가문의 상처가 너무도 컸던 탓에 일체의 출사를 거부하고 철저하게 은둔한 채 '징사(徵士·학문과 덕행이 높아 임금이 부르나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은사)'를 자처하며 평생을 살았다. 1674년 명재 선생은 우암 선생에게 부친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던 일로 편지하였고, 이후 수차례 개찬(改撰)을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1681년 여름 '신유하의상서(辛酉夏擬上書)'를 지어 송시열 선생을 '왕패병용(王覇竝用)·의리쌍행(義利雙行)'이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스승 송시열 선생을 통렬히 비판한 이 글로 인하여 노·소론의 분당은 가속도가 붙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명재 선생은 자신의 복잡한 심리적 갈등 속에서 '신유하의상서'를 작성하기 몇 달 전에 이미 다음과 같은 '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 시를 짓기도 하였다.

'돌아가리라/ 또다시 무엇 하러 교유를 일삼으랴/ 지난날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스승을 찾아가 질정(質正) 받으며/ 가야 할 길 먼 일만을 걱정했었지/ 하루아침에 반성하며 스스로 의심하나니/ 도리어 벗들에게 부끄럽기만 한 것을/ 쇠붙이를 금인 줄 알고 있었고/ 노도 없이 배를 저어 가려 했으니/ 태질을 치료하기 어려운 걸 걱정하고/ 궤우가 많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함께 길을 가면서도 생각이 다르니/ 어찌 근원이 다른 물 함께 흐르랴/ 구차하게 화합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탄식하며 돌아가 쉬리라'

이 '차귀거래사'는 중국 진나라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시에 차운한 시이다. '귀거래사'는 은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의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지금까지의 관리생활이 마음의 형역(形役·육체의 노예)으로 있었던 것을 반성하고 자연과 일체가 되는 생활 속에서만이 진정한 인생의 기쁨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명재 선생의 작품도 호란으로부터 비롯된 가문애사와 학문, 정치적 소용돌이 속 복잡한 심리상태를 한 편의 시로 표현해낸 것이다.

명재 선생이 18번의 상소로 우의정을 사양하고 평생을 근신하며 백의정승으로 살아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스승 우암 선생과 등을 돌리며 팔십 평생을 소론의 영수로 살아가야만 했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아마도 국가의 위란에 가장 먼저 목숨을 끊어 '강도 최초 순절여성'의 길을 선택한 어머니 공주이씨(1607-1637)의 죽음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병자호란이 없었더라면 윤증 선생은 백의의 정승으로, 또 평생을 배사(背師)의 시비와 쟁론 없이 선비로서의 삶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국가가 바로 서지 않았을 때, 백성들의 삶은 혼란과 도탄에 빠지게 되어 있다. 1636년 12월과 이듬해 1월, 수많은 여성들이 눈보라 쳐대는 강화도 푸른 바닷물에 몸을 던져,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오늘 명재 선생의 간찰을 읽으며, 파도가 할퀴어 대고 있는 강화도 앞바다에, 이리저리 떠다니던 하얀 머릿수건이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저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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