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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아이콘인 헬렌 켈러와 미국을 대표하는 대통령 우드로 윌슨,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대다수 사람이 위대한 인물로 추앙한다.

시각·청각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1880-1968)의 위인전은 어린 시절이면 한번쯤 읽고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앤 설리번 선생의 도움과 눈물겨운 노력으로 중증장애를 극복한 스토리가 영화 `미라클 워커`로 재현돼 그늘진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줬다. 켈러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힘든 고난에 처하더라도 항상 기적이 존재한다는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우드로 윌슨(1856-1924)은 미국의 제28대 대통령(1913-1921)이자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지낸 학자다. 남북 전쟁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첫 남부 출신이다. 정치와 행정을 분리한 대통령이자 민족자결주의를 전파한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아 노벨평화상을 받고 10만 달러 지폐 초상화의 주인공이 됐다.

켈러와 윌슨의 치적은 대다수 미국 교과서에 천편일률적으로 등장한다.

제임스 로웬의 저서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에는 미국 역사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축소·왜곡, 억지 영웅만들기의 실태가 담겨 있다.

책에 따르면 켈러는 성인이 되면서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변신한다. 맹인 복지를 위한 일에 앞장서던 켈러는 장애가 무작위로 생기는 게 아니라 하층계급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에 찬사까지 보내는 등 과도하게 사회주의 활동에 몰입해 그간 지지를 보냈던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보수 언론은 불순세력이 온전치 못한 켈러에게 그릇된 정보를 전달해 사회주의에 빠뜨렸다고 비난했다. 켈러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으므로 매체는 그녀의 사회주의 성향을 최대한 숨기고 장애를 극복한 기적의 연인상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윌슨은 진보적인 이미지가 강해 흑인의 지지를 업고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취임 이후에는 인종차별로 돌아섰고 외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여성참정권은 윌슨 행정부 때 얻게 됐지만 당초 윌슨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주의적 극우단체인 KKK단의 활동을 지지했고 우리나라의 다문화가정격인 `외국계 미국인`을 적대시했으며 참전을 반대하는 사람을 색출해냈다. 멕시코, 아이티, 도미니카, 쿠바, 파나마 등지에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 식민지화했으며 니카라과에는 재임시절 내내 군대를 상주시켜 대통령 선출 등 내정에 간섭했다.

윌슨은 급기야 1917년 러시아 내전에 미군을 몰래 파병해 전투까지 벌였다. 미국교과서에는 러시아 파병이 언급되지 않지만 러시아 교과서에는 자세히 언급돼 러시아 국민이 미국에 반감을 품은 원인이 됐다.

켈러와 윌슨은 약간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업적이 있지만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에 이르면 과하다 싶을 정도다.

교과서에서 콜럼버스는 진취적이고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신대륙을 발견한 아메리카 최초의 영웅으로 묘사돼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 날을 국경일로 정할 정도로 신격화하고 있지만 사실을 파헤쳐보면 콜럼버스는 단지 금을 얻기 위해 아이티에 상륙해 수많은 원주민을 착취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 노예장사에 혈안이 됐다. 더욱이 신대륙은 콜럼버스가 처음 발견한 게 아니라 그 이전에도 각 대륙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았다는 사료가 곳곳에 남아있다.

콜럼버스 데이 국경일을 지켜보는 남미 국가들의 심경은 분노 그 자체일 것이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이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개명하고 "신대륙 발견일은 히틀러보다 악랄했던 외국인 정복자들이 150여년에 걸쳐 원주민 대학살을 시작한 날"이라며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지역에서 대량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기다린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역사관에 반감을 드러내는 남아메리카를 생각하니 독도영유권을 명기한 교과서를 채택한 일본의 도발이 오버랩된다. 일제 강점기 만행과 위안부 기술을 외면하는 그들의 치졸한 이중성에 측은지심이 들 정도다.

19세기 미국의 지도자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참된 애국자란 민족의 죄를 변명하지 않고 질책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왜곡과 은폐를 통해 역사적인 영웅을 만들어 국민을 맹목적 애국자로 만들려는 정책은 장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나라를 자중지란에 빠뜨릴 국수주의자가 아니면 냉소주의자를 양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로웬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제도권의 영웅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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