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구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위암협진팀장
김정구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위암협진팀장

며칠 전 방송과 신문지상에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지병인 암 치료를 중단하고 고향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물론 치료를 중단하겠다는 뜻은 의학적인 도움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병원에서 암 치료를 목적으로 한 의료행위를 더 이상 하지 않고, 통증 조절 등 호스피스 완화요법을 받겠다는 것이다. 물론 세세한 내막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효과를 장담할 수 없는 치료로 단순하게 생존기간을 연장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치의 현실을 인정하고 생의 마지막, 즉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준비에 더 중점을 두겠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지난 시간 의료 환경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진료 수준의 변화만이 아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질병과 건강을 대하는 문화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죽음을 바라보는 견해도 그렇다. 살아있을 때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대비해 필요한 처지를 정해놓기까지 한다. 물론 대다수의 견해는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순간이 다 인 것 같지만 죽음도 흔한 일이다. 그러나 평생을 우리들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을 주로 한다. 심지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죽음의 순간을 자주 경험하는 의사인 나도 마찬가지다.

막 의사가 됐을 때 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라는 사람은 반드시 나아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치료라는 명분이 가장 중요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었다. 자신의 병과 치료 방법을 잘 모르는 환자의 의견, 경제적인 어려움, 치료의 부작용 그리고 삶의 질은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이런 나에게 죽음은 '불편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나의 가장 큰 오해는 생명이 저절로 끝이 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상당 부분 죽음은 환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죽음의 순간이 의사와 가족들의 합의로서 결정되는 것을 보고 깊은 고민을 했던 적도 있었다.

임종이 얼만 남지 않은 환자의 진료는 힘이 든다. 별다른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것과 생존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보호자에게 해야 하는 상황이 더욱 그렇다. 환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결정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의사도 보호자도 환자에게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했다. 불치의 상황을 인정하고 추가적인 치료에 신중한 보호자에 비해, 무엇이던 하길 바라는 적극적인 보호자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바로 당사자였다. 저 분이 의식이 있었더라면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원했을까? 당사자는 놔두고 우리가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아마도 이 모든 혼란을 끝낼 가장 중요한 결정 인자가 있다면 우리 부모님이 생전에 이런 상황에 대한 의사 표현이 있었으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죽는 순간이 생전에 합의한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도 그 한 가지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가끔은 무의미한 치료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이제는 그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중요한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할 만큼은 했고, 끝을 내도 미련이 없다는 뜻이다. 환자에게 닥치는 불행이 억울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어떻게 죽을 지에 대해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해준 의료진과 가족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기도 하지 않을까?

카터의 선택이 무조건 옳다거나 연명치료에 대해 반드시 견해를 가져야 한다는 의도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한 번은 생각해 볼 일이라는 것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할 때 우리들에게 생각나는 말이 있다면 이런 것이지 않을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조용히, 가족과 함께….

김정구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위암협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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