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학 충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홍지학 충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건축은 사회 구성원이 약속한 제도의 시스템을 공간으로 구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학교는 교육이라는 제도, 병원은 의료 서비스라는 시스템을 물리적인 모습으로 형태를 만들어 낸 것이 건축의 시작인 셈이다. 이렇게 사회 속 건축이 목적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것을 우리는 건축의 유형학이라 부른다.

현대 도시에는 수많은 유형의 건축들이 용도와 기능에 따라 다른 원리를 지니며 복잡한 현대 사회의 구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건축이 하나의 유형으로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면서 폭발한 서구 사회의 변화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산업혁명을 관통하며 시민계급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상업이 그 어느 때보다 위치를 차지하는 근대화 시기엔 증권거래소, 박물관, 병원, 학교, 교도소 등 다양한 도시 구성 요소들이 전문화되고 세분화돼 고유한 건축 유형을 정착시켰다.

우리가 여전히 '모더니즘의 세상에 살고 있다'라는 이야기는 근대에 구축된 건축의 유형들 덕분에 현대 도시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다양한 건축의 근대적 유형 중에서 현대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을 하나 골라야 한다면, 쇼핑몰이 떠오른다.

서구 사회의 모더니즘은 대개 유럽을 기원으로 한다. 근대적 건축 유형도 대개 유럽의 산업혁명 시기를 겪으며 그 형태를 갖췄다. 그런 면에서 쇼핑몰은 그 태생이 미국에 있다는 점이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미국은 20세기에 들어서며 세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급격히 팽창된 사회를 마주하게 된다. 늘어나는 주택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도심이 아닌 교외 지역에 대규모 주택지를 공급했다. 여기에 석유회사들과 자동차 메이커의 로비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아이젠하워 정부에 이르러 승용차를 주된 이동 교통수단으로 채택하는 정책적 방향 설정이 더해졌다.

이렇게 형성된 교외 지역은 도심으로 통근하는 근로자의 베드타운으로 기획돼 주택이라는 단일한 용도로 가득 찬 도시가 됐다. 대부분 단독 주택으로 지어지며, 교외는 전체가 저층 저밀도의 건물로 가득 찬, 승용차가 없으면 이동할 수 없는 자동차 중심의 환경을 만들었다. 주거 중심의 도시였기에 사회가 유지되는데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는 복합적인 토지 용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교외 지역도 공동체를 이루고 다양한 여가 활동이 필요했기에 이를 감당해줄 건축 유형이 자연스레 등장하게 됐다.

주택의 뒤를 이어 교외 지역에 나타난 또 다른 건축 유형은 소비 행위를 구체화 시킨 쇼핑몰이었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공간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주택 다음으로 대두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미국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교외 지역엔 대규모 쇼핑몰들이 하나씩 들어서게 됐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 빅터 그루엔은 미국의 교외 쇼핑몰을 발명한 인물로 추앙받는다. 그는 쇼핑몰 건축 계획에 있어 일종의 공식을 만들었다. 교외 지역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모이고 밀집된 활기를 자아낼 수 있는 곳이 쇼핑몰밖에 없다는 점을 착안해, 그 안에 쇼핑과 무관한 공공서비스, 갤러리, 공원, 레저시설, 도서관 등의 기능을 뒤섞었다. 쇼핑몰을 일종의 사회생활 거점, 커뮤니티의 중심 공간으로 재구상했다는 것이다.

복합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몰(mall)이라는 공간 유형이 지니는 특유의 수용성에서 기인한다. 몰은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소구하는 행위인 산책을 매개로 서로 다른 다양한 기능을 독자적으로 병치할 수 있는 공간 언어이기 때문에 이질적인 기능공간들이 어색하지 않게 한 공간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건축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보이고 있는 건축가 렘콜하스도 '모든 것이 쇼핑몰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상기한 공간적 특성 덕분에 현대 도시에서 쇼핑몰이라는 건축 유형은 단순한 상업 공간의 영역을 넘어서 철도역, 미술관, 호텔, 문화복합공간 등 고밀도의 행위가 집중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쇼핑몰이라는 유형은 현대 도시에 가장 큰 영향을 마치는 모더니티의 산물이 되고 있다.

홍지학 충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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