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구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 위암협진팀장
김정구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 위암협진팀장

"교수님 이제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힘들 거면 시작도 안 했을 겁니다. 입원 안 합니다."

원망 어린 눈초리로 나를 한번 쏘아보더니 한동안은 연락도 받지 않는다. 결국 항암치료를 계획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멈춰야 했다.

항암치료가 중단된 것 말고도 더 큰 문제는 환자가 가지는 의료진에 대한 신뢰도 함께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다. 항암치료는 더 이상 하지 않을 테니 정기적인 진료는 필요하다는 말도 이제는 듣지 않는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전까지 이 환자는 소위 의사의 지시를 잘 따르는 환자였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수술을 잘 견뎌내고 수술 직후 의료진의 지시사항도 잘 따르고 식이 교육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켜내던 치료 순응도가 좋은, 의사들이 말하는 '착한 환자'였던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의료진의 지시 혹은 권고사항에 대한 환자의 반응이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순응도'라고 말한다. 암과 같이 장기간 또는 어느 정도 난이도가 있는 진료에서는 순응도가 치료의 결과에 많은 영향이 있어, 이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정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항상 부작용이 있는 항암치료를 잘 받는 환자들, 수술 후 통증을 이겨내면서 기침이나 심호흡 혹은 운동 등 의료진의 지시사항을 묵묵히 시행하는 '착한 환자'들만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진료 현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당히 흔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의사의 지시 사항을 잘 따르지 않는 '까다로운 환자'들도 항상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 글의 의도는 순응도에 따라 환자를 구분해 갈라치기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또 치료의 순응도가 낮음을 오로지 환자의 문제 즉 개개인의 성격이나 신체적 조건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의사를 포함한 의료진의 요인도 환자의 순응도에 큰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의미가 있다. 성취도가 낮은 상황을 오로지 수업태도가 불성실한 학생 탓으로만 돌리면 해결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지도가 제대로 됐는지 그저 판에 박힌 방법으로 각자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원래 한쪽 다리가 불편한 이 환자에게 항암제의 말초 신경 독성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들 참으면서 항암치료를 합니다." 라는 말은 위로가 되기보다는 야속한 말로 들렸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참을 만한 일이거나 약간의 불편함도 나에게는 치료를 중단하게 하는 큰 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착한 환자가 고집불통 할아버지가 된 이유인 것 같다.

요즘은 소위 '맞춤형 치료'가 대세가 되는 시대다. 같은 암에는 동일한 작용기전을 갖는 약제를 사용하는 전통적인 항암치료에 반해 맞춤형 치료는 각 개인의 암의 특성이 다르며 이런 특성에 고려해 치료제를 선별해 사용한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이런 약제를 '표적 치료제'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렇듯 과학의 발전은 암의 이해와 치료에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반면에 암환자에 대한 나의 이해나 자세는 여전히 제자리인 것 같다. 진정한 맞춤 치료는 환자에 대한 일률적인 접근이 아니고 개별화된 인격체로서 환자를 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나는 그 환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이것 저런 불편함을 토로하면서 '아니 의사선생님이 그것도 모르세요'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불끈하며 '의사가 어떻게 모든 걸 다 압니까?'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질문의 의미는 내가 해당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혹은 없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어려움을 이해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묵묵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오히려 상처가 되는 말을 해 버린 것 같다. 내 답변처럼 의사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최소한 그 당시 그 질문의 숨은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정구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위암협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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