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표 예산군의회 부의장
홍원표 예산군의회 부의장

김태흠 충남도지사는 왜 예산군에 의병기념관을 세우려는 걸까? 그 이유는 예산군의 의병역사를 살펴보면 곧바로 해석된다.

반만년 역사 속에서 대한민국의 최초의 의병은 예산군에 있었다. 바로 백제 부흥운동이다.

대한민국의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선생은 백제 부흥운동에 대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최초의 의병'이라 평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3차 침입이 있었던 1236년(고종 23년) 겨울, 몽고군이 공격해오자 예산군 대흥현 주민들이 임존성으로 들어가 견고한 방어를 하면서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 적을 대파하여 결국, 몽고군의 3차 침입을 막아냈다. 이런 역사가 예산지역의 의병역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임진왜란 때에도 예산군의 향천사 주지스님을 비롯한 50여 승려들이 의병에 참가했다. 주지 스님과 스님들이 출정한 사이 왜군이 향천사를 찾아와 절을 불태웠다는 기록 등을 보아 당시에도 의병활동이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병의 역사에서 갑오개혁, 청·일전쟁, 3·1운동과 독립군 구성에 이바지했던 동학농민혁명을 빼놓을 수 없다. 1894년 전라도 전봉준 장군의 고부관아 점령이 불씨가 되어 같은 해 내포(예산)지역 농민들이 태안관아, 해미읍성과 대흥관아를 차례로 점령하면서 갑오농민전쟁이 충남에도 확대됐다, 특히, 대흥관아 점령 사건은 관군의 강경 진압의 계기가 됐다.

당시 예산군 덕산의 대접주였던 춘암 박인호 장군의 지휘 아래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 동학 북접군은 토벌군인 관군과 정예 일본군과 맞서 승전곡·신례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예산군에는 내포 3만여 농민군이 승전했던 관작리 전적지와 관군의 무차별살육을 피해 은둔해 숨어지내면서 형성된 주교리 '은골'과 집단 정착 마을인 탄중리, 농민군 지휘본부였던 삽교 성리 '예포대도소'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동학의 수장을 '덕포', '예포'라고 부를 정도로 예산군의 동학세력은 꽤 강했으며 그들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각종 의병활동, 민족운동, 3·1운동 자금지원, 6·10만세운동, 신간회 등을 지원했다.

이러한 예산군의 동학군 세력의 힘을 빌려 1905년 을사조약과 단발령을 계기로 안병찬·채광묵 등이 민종식을 총수로 추대해 1906년 3월 15일 예산군 광시에서 봉기하여 홍주성을 점령한 사건이 바로 홍주성 전투다.

홍주성 전투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예산군 대술면의 수당 이남규 선생이 민종식을 숨겨주고 재기를 도모한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살해 당했지만 결코 일본군에게 비굴하지 않았다. 이 또한 의로운 선비 정신이요, 예산군의 의병 정신이다.

이러한 예산군의 의병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예산군에는 무장독립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충청·전라지부장을 역임했던 일우 김한종 의사가 있었으며 이러한 예산군의 의병 정신의 정점에 계셨던 분이 바로 매헌 윤봉길 의사다.

이런 관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근의 홍성지역에선 홍성군의회가 의병기념관 유치성명서를 채택하고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충남의 의병전쟁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회하는 등 충남의병기념관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예산지역 의병역사를 왜곡하고 능멸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예산군과 홍성군의 각종 사업 유치경쟁은 '삽교역사건립'부터 다소 부딪힘이 있지만 앞으로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우리들의 후손에게까지 올바르지 못한 지역역사관을 인식시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예산군이 의병과 관련이 없다는 것처럼 보도하는 홍성군의 행태는 자기 지역에서 자라는 학생들까지 역사를 재대로 모르는 학생들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엔 마음 아프다.

이렇듯 예산지역의 반만년 의병 역사를 왜 김태흠도지사가 모르고 있겠는가?

충남도지사가 예산군에 왜 충남의병기념관을 새우려 하는 지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다.
 

홍원표 예산군의회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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