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추석, 군대 연병장 OX게임에서의 권위에 대한 단상
사회지도층 "모른다"…권위를 실추 이미지와 동일시
심리학연구 "'몰랐다'는 거짓말"…진정한 권위는 '정직'

우세영 취재1부장
우세영 취재1부장

30년 전의 일이다.

1992년 추석 즈음. 경기도 지역 내 모 대대 연병장에선 OX게임이 진행됐다. 부대의 모든 병사가 참여해 정답 여부에 따라 OX로 이동, 마지막 한 명을 가르는 그런 게임 말이다. 축구나 족구, 계주 등의 중대 간 경쟁이 아닌, 최종 우승자에겐 포상 휴가가 걸린 비교적 큰 게임으로 병사들의 '눈치보기'가 대단했었다.

3-4번째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글창제는 1446년이다. 맞으면 O, 틀리면 X로 움직여라"

중대원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움직였다. 부대에서 유일한 국어국문학과 출신이자. 이른바 제대를 2개월 앞둬 게임조차 참여하지 않은 채 1중대장 옆에 앉아 있는 '말년병장' 쪽으로. 당연히 정답은 'X'였고, 병장의 고개는 'X'방향으로 향했다.

중대원들은 희희낙락하며 연병장 'X'칸에서 어서 빨리 답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출제자인 본부중대 소대장의 입에선 'O'라는 정반대의 단어가 내뱉어졌다.

이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의 도출 과정은 어떠했을까.

웅성대는 병사들을 놓고 1중대장과 제출자인 본부중대 소대장, 대대장은 연병장 한 구석에서 의견을 나눴다. 국문과 출신인 말년 병장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대대장은 말년 병장을 따로 불렀다. 그리고 속삭였다.

"(제출자인 소대장의) 권위가 떨어져서 안 되겠다. 이해해라"

이후 대대장은 1중대장에게 비공식적으로 병사들의 포상휴가를 약속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글창제가 이뤄진 시기는 1446년이 됐고, 바뀐 역사의 뒤에는 포상휴가가 거래됐다.

요즘 말로 '웃픈(웃기지만 슬픈)' 이야기다.

도대체 '권위'가 무엇이기에 수많은 병사들 앞에서 대놓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을까?

또 그렇게 하면 권위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흔히 권위는 '권력'과 동의어(지배적이라는 의미에서)로 사용되지만, 철학적으로나 정치사회학적으로 변별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권위의 궁극적 근거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대부분 자발적이고 비폭력적이다. 반면 권력은 타인을 강제·복종할 수 있는 힘(제도적·비제도적)을 의미하며 타율적이다. 이에 따라 권력에 정당성을 더한 개념으로 권위를 해석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게 긍정적인 단어인 권위가 정치인, 고위공직자, 대기업 대표, 대학 교수 등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연계 시 '권위'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물론 실추의 이미지와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은 "모른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등을 연발하며, 권위를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아주대학교 김경일 교수는 '권위와 신뢰가 주는 착시와 핑계'라는 글에서 "권위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책임을 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핑계를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그 행동을 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면서도 말이다. (중략) 신경과학적 방법을 사용한 심리학 연구들은 그 몰랐다는 변명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라며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은 자신의 양심을 종종 이 권위와 맞바꾼다"라고도 말했다.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권위의 근거는 사람의 마음이고, 권위에 대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혹시 '정직'이 아닐까.

소대장·중대장·대대장의 "실수였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을 '한글창제 시기'와 같은 사건들이 30년이 지난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신문에서, TV에서, 인터넷에서 매일 목도되고 있다. 권위라는 단어를 잔뜩 포장한 채 말이다.

여담으로 한글창제 사건 이전까지 친했던 본부중대 소대장과 말년 병장의 관계는 금이 갔고, 중대장과 대대장에 대한 존중감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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