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로 가니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340쪽 / 1만8000원)
소년 이어령이 바라본 일제시대 '식민지 교실' 모습
이어령 지적 대장정의 결정판, '한국인 이야기' 완간


1933년생 소년 이어령이 처음 들어선 교실에는 일장기가 걸렸고 아이들은 교과서에 적힌 일본어를 따라 읽었다. 한 해가 지나 식민지 소학교의 이름이 '국민학교'로 바뀌며 더욱 심상찮은 일들이 벌어진다. 한국어가 금지되고 학생들은 선생의 지령에 따라 조선말을 쓰는 친구의 딱지를 빼앗으라고 가르쳤다. 일제강점기가 이어질수록 아이들이 뛰놀던 운동장은 전시물자 생산기지가 되고 학교는 작은 병영이자 예비병 훈련소가 됐다.

어느 날 소년은 교실에서 흘러나오는 풍금 소리를 들었다. 집에서는 한국말로 불렀고 학교에서는 일본가사로 노래했던 왈츠 곡이었다. 소년은 풍금 소리는 가사 없이도 혼자 울릴 수 있으니 일본말이든, 한국말이든 상관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고(故) 이어령 교수는 최근 출간된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네 번째 책이자 1부 완결편인 '너 어디로 가니'에서 식민지 시절 교실 풍경을 위와 같이 회상한다.

저자는 붉은색 일장기, 황국신민의 서사, 대동아공영권 등 슬로건, 운동회나 축제에서 접하는 홍백전의 붉고 하얀 색깔 등 일제가 아이들을 지배하려고 했던 국가주의적 소재들을 언급한다.

특히 일제가 선전 수단으로 활용한 노래에 주목한다. 그는 "일본 군가는 철저히 죽음의 세계를 찬미한다. 음악을 전쟁 도구로 사용하면 저항 의지가 그만큼 약화한다"며 "자꾸 들으면 세뇌를 당하기 마련이며 소리 텍스트가 그만큼 무서운 힘을 지난다"고 말한다.

책은 총 12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군국주의적 슬로건들이 동아시아 전통의 상징체계와 어떻게 부조화하는지를 다뤘다. 2부 군사문화에 침잠하던 식민지 국민학교가 학교의 본질과 어떻게 불화했는지, 3부 한국말 금지가 조선 아이들에게 어떤 상처와 극복의지를 남겼는지를 들여다본다. 4부에서는 일장기라는 국가주의적 상징의 귀결이 곧 제국주의 전쟁이었음을 목격한다. 5부에서 '식민지 반도' 속에서 탈출하려는 아이들의 결의가 읽힌다. 6부 제국주의 연성 상징들이 어떻게 과거의 세계를 파괴하고 아이들을 억압으로 몰아넣는지를 추적한다. 7부 근대 여명기의 놀이문화를 밝히고, 8부 관료제의 상징인 제복을 놓고 근대적 세계의 다양한 측면을 풀어낸다. 9부 '파랑새 이야기'가 테마로 나쁜 기억도 삶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선사하고 10부 부재하는 아버지-국가와 침략자인 아버지-국가를 대비시키며 모성이라는 가치를 재조명한다. 11-12부는 앞서 내용으로부터 이어지는 결론으로 저자의 지론이자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핵심 테만인 생명 사상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제 지배 시대 몸소 살아낸 식민지 교실의 당사자이자 문화서적인 맥락에서 근대의 유년을 명확히 풀어내는 인문학자의 체험단이라면 그 아픔과 저항, 극복의 역사는 더 깊고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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