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익수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방익수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10년 전, 주일학교 여름 수련회를 위해 답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장소는 시골에 있는 한 폐교였는데 시설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열악했다. 화려함과 편리함에 익숙해진 학생들의 눈높이에는 결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장소에 맞춰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이미 준비한 상태였고 다른 장소를 물색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장소를 먼저 찾아 본 주일학교 교사들이 지도자인 필자의 눈치를 살피는 등 행사가 어그러질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상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학생들의 구미에 맞는 환경은 제공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고, 평소에 학생들이 경험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불편함을 그저 불편함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등 모두가 큰 교훈을 찾을 수 있는 행사가 될 수 있었다.

불편을 피하려 하고 불안을 없애려 하며, 안락함을 좇고 안전함을 찾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고, 인간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利器)들도 편리함을 추구하는데 얻어진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또 경제·문화활동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어제보다 더 편리하고 안전한 오늘, 오늘보다 더 안락하고 즐거운 내일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긴 역사의 흐름과 각 시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생활은 불편함 투성이다. 멀지 않은 과거의 시간과 비교한다면 매일매일은 더 개선되고 발전되고 우리의 하루는 불편과 불안과의 싸움일지 모른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벗어나는 차원의 불안이야 우리가 어찌할 수 없겠지만 일상에 관련된 불편함은 극복이나 제거의 대상일 뿐이고 불편이 그저 불편으로 남고 불편함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악(惡)이요, 부조리일 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불편함을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도 큰 문제가 된다.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불편함, 피해야 하고 무가치한 편리함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 수많은 불편함이 우리를 편리하고 안전하게 이끌어 우리 존재를 더욱 성장시키고 있다. 우리는 많은 불편을 적극적으로 감수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 그 가치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꾸준히 불편함의 과정을 거쳐야만 건강할 수 있고 지식이나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만일 편리함만 추구하고 모든 불편함을 거부한다면 건강한 신체나 학습된 능력은 결코 얻을 수 없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갓생' 역시 과도하거나 비생산적인 것이 아니라면 의미 있는 불편을 통한 자기 성장의 모습일 수 있다.

이는 생활 환경이나 생태 환경에도 마찬가지다. 무분별한 소비나 개발 등 과도하고 무의미하게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상생과 보존을 위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불편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편의 의미를 아주 지혜롭게 깨닫는 일이다.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과 미래와 후세를 위한 작은 포기는 더 큰 가치와 의미로 연결된다.

의미 있는 불편을 찾고 받아들이는 작업은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맺는 수많은 관계에는 거의 반드시 불편함이라는 것이 자리하게 마련이다. 보다 나은 관계를 만든다는 것은 무의미한 불편을 줄여나가고 의미 있는 불편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랑관계든, 이해관계든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특히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하는 관계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의미 있는 불편을 수용하지 않고 회피할 때 역시 관계는 틀어지거나 깨질 수 밖에 없다. 또 건강한 관계는 서로 간에 불편함이 아예 없는 사이가 아니라 의미 있는 불편함을 서로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관계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불편함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 불편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어떤 가치를 실현해 나가느냐에 따라 하루는 그저 피곤하고 불만스러운 하루일 수도, 보람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 과연 나의 불편한 하루를 어떻게 의미있는 하루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즐거운 고민을 해보면 좋겠다.

방익수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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