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일본에는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거울, 칼, 그리고 곡옥을 가리키는 '3종 신기' 라는 말이 있다. 1960년대 일본이 고도 성장을 이루면서 대부분의 가정에 보급된 세탁기, 냉장고, TV 등을 새로운 '3종 신기'로 불렀는데, 이제는 팩스, 도장, 그리고 종이가 '21세기 판 3종 신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한국 사회가 전반적인 디지털 문화로 빠르게 전환된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아직도 웬만한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이 세 가지가 '현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레거시 문화를 버리지 못한 탓이다.

첫째, '팩스'다. 팩스는 우리나라도 일부 사용은 하지만, 일본에서는 정부부처와 기업은 물론 일반 가정집까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연예계 소속사가 기자들에게 자사 연예인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방법으로 팩스를 보냈다거나, 코로나19 확진자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일일이 팩스로 전송했다는 이야기는 가짜뉴스가 아니다. 2020년 일본 총무성 조사에 의하면, 50~60대의 절반 가량이 가정 내에 팩스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재임기간 2020.9-2021.10) 전 일본 총리는 디지털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천명했고 전자서명 방식을 도입해 행정처리 속도를 높이겠다며 '부처 내 팩스 폐지' 방침을 발표(2021. 6)했지만, "이메일은 사이버 공격으로 인한 정보 유출 우려가 있고 국회의원들이 팩스를 선호한다"는 반론이 대세를 이룬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팩스 문화를 타파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일 걸릴 것으로 보인다.

둘째, '도장' 문화다. 일본이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서양 문물을 대거 받아들이면서도 유독 사인 문화는 채용하지 않았다. 2019년에는 서류를 스캔하여 날인할 곳을 식별한 후 도장을 찍어주는 최첨단 로봇이 개발되는 등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선 도장을 찍어야 서류의 품격과 신뢰가 살아난다는 오랜 믿음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신입사원 연수과정에 '도장 예절'이라고 하여 결재란에 도장을 찍을 때 부하 직원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듯 왼쪽으로 비스듬히 찍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거래처가 요구하는 계약조건에 도장을 찍는 란이 있어 이를 따를 수밖에 없고, 게다가 자민당 내 20여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도장의련'(일본의 도장제도 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이라는 단체가 탈도장 정책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 쉽게 바뀌기 어려운 구조이다.

셋째, '종이'다. 우리나라는 보통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를 필요로 할 때나 종이로 인쇄하는 정도이지만, 일본은 문서나 데이터를 컴퓨터에 저장한다 해도 별도의 종이서류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대도시든 시골이든 병원에서 보관하는 환자 진료기록을 컴퓨터에 저장해 놓아 언제든 환자가 오면 쉽게 데이터를 찾아 진료를 볼 수 있지만, 일본은 병원이 도서관도 아니건만 접수대 뒤쪽의 서류꽂이에 진료카드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곳이 많다. 이러한 종이문화는 앞서 설명한 팩스와 도장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일본인들이 종이를 사용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치 팩스를 이용하기 위해, 그리고 도장을 찍기 위해 종이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아니 어쩌면 종이를 사용하기 위해 팩스와 도장을 고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디지털화를 체험하게 하고 싶다면 PC방에 데려가라는 우스갯소리는 농담이 아닐 정도로 한국의 IT 인프라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배재대학에서는 학생들 스마트폰과 연동시켜 출결석을 자동 체크하는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한다. 한국에서는 원룸에 이르기까지 디지털도어를 사용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열쇠를 들고 다녀야 한다. 디지털화로 인해 없어질 오래된 장수기업과 아날로그화된 직업을 유지하려고 하는 일본식 '和'의 문화가 어쩌면 일본사회를 혁신으로 가지 못하게 짓누르고 있는 '계륵'일지도 모르겠다.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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