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공간, 집을 얻다."

김소연 (공간 소이헌 대표)
김소연 (공간 소이헌 대표)

 

2015년 12월,

겨울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던 오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구도심에 한옥 한 채가 나왔으니 보지 않겠느냐는 전화였다. 빌딩 한 켠에 심리연구소를 만든다는 것이 영 탐탁치 않은 차에, 한달 전 쯤, 갤러리를 하는 지인에게 연구소를 할 만한 한옥 한 채를 부탁했는데 마침 작은 와가 한 채가 매물로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생면부지의 선화동네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화동 191-9번지,

1955년, 전쟁 직후 대전의 근대 도심과 함께 지어진 아담한 기와집으로 90년대 법원이 둔산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법원직원들을 상대로 하숙을 치던 집이었다. 연이어 달아낸 불법건축물들로 처음 지어진 와가의 원형을 찾을 수 없었으나 6개월 후, 연못과 중정이 있는 우아한 도시 한옥으로 거듭났다.

"단기 4288년(1955년) 4월 유시(오후5시-7시)에,

집의 앉은 자리를 북동으로 기둥을 세우고 마룻대를 올리니

성주신은 정사생의 사람을 굽어 살피시어

하늘의 삼광(해,달,별)이 응하게 하시고 오복(수, 부, 강녕, 수호덕, 고종명)을 갖추게 하고 많은 생물이 함께 자라고 산과 물이 밝게 거듭거듭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집의 상량문 내용이다.

상량문에는 그 집의 역사와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래서 상량문을 보고 있으면 이 집을 지었을 이들의 간절한 염원을 느낄 수가 있다. 그 염원을 빌었던 정사생의 이 집 가장의 염원을 나 역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물 자리인 작은 샘터에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연못에 연꽃을 심으며 이 공간을 이용하는 많은 이들에게 하늘의 삼광이 응해서 인간의 오복을 함께 해 달라 빌고 빌었다.

9번지 집을 고쳐 지은 뒤, 몇 개월 후 193-4번지, 193-5번지, 6번지를 합해서 도심 속의 정원이 있는 갤러리와 카페를 만들어 놓으니 유럽의 어느 뒷골목에 온 듯 했다. 도심의 골목이 마치 한국의 시골 동네 고샅길을 연상하게도 했다.

어릴 적, 집은 나에게 숨을 수 있는,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세상이 무섭고 서럽워 외로워도 집, 그 곳에는 조건 없이 내편이 되어주는 내 가족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넓고도 서늘한 두루마기 소매 뒤에 숨으면 모든 것이 내 세상이 되는 곳이었다. 고향집을 떠나오면서, 내 한 몸, 숨길 공간조차 없이 나신을 그대로 세상에 드러내고 사는 듯한 불안감과 긴장, 어느 사이 도심 속 삶에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1987년에 지어진 191-14번지에 내 주택까지 안주하니 비로소 이 곳 선화동이 내면의 그림자까지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笑以軒(소이헌)'

태백의 산중문답 중 둘째 구의 笑以不答心自閑(웃고 대답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마음이 한가롭다) 중에 글자를 빌어와 택호를 짓고 나니 모든 심신이 한가로운 듯 했다.

현대인들에게는, 제 3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집을 제1의 공간, 직장을 제 2의 공간이라면, 집과 직장과 상관없이 스스로 가고 싶고 정서적으로 끌어당기는 제 3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1

공간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는 공간을 바꿀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이 레트로에 열광하고, 빈티지를 찾아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는 것도 정서적 치유와 자기만의 만족을 찾으려는 행위일 것이다.

쓰레기와 길고양이들이 그 주인인 것처럼 난무했던 선화동 골목에 꽃들이 골목을 장식하고 젊은이들이 차를 마시러 찾아온다. 그들은 선화동 골목을 걸으며 유럽의 어느 뒷 골목을 상상하고, 부모세대들의 문화와 추억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경험들 속에서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대전의 정체성을 모르겠다고 한다. 다양한 대전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원도심이 그 해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소연 (공간 소이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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