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혜 건양대병원 55병동 간호사
이익혜 건양대병원 55병동 간호사

도망가야겠다. 입사 3시간 만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쏟아지는 입원환자, 각종 검사, 시술, 수술, 채혈에 수혈까지. 내 정신을 쏙 빼먹고도 나는 삽시간에 배워야만 했다. 분명 나는 간호학과의 모든 교육을 이수하고 실습 1000시간을 마친 A+ 학생이었는데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배움의 시간은 지옥이었다. 어떤 간호사라도 그 기간을 그렇게 보냈겠지만 쏟아지는 오더를 받아내고 준비하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먼저 입사한 동기는 이걸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그래, 내가 못나서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구나 하고 느낄 정도였으니. 나보다 한 달 먼저 입사해 한 달을 이곳에 더 있었을 동기를 보며 힘보다는 자괴감을 더 느낄 시기였다. 하지만 3월 동기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너 없으면 난 동기가 없잖아.' 그 말이 뭐라고 날 이 악물게 했을까. 그래, 혼자보단 둘이 낫지. 너도 힘든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렇게 애써 위안을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독립을 앞두고 밀려오는 압박감과 불안함, 어디에도 속할 곳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걸음마다 눈물을 흘렸다. 도저히 일이 손에 익질 않았다. 병동 안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자존심 하나로 버티며 못하는 일이 없었던 내가 이 곳에서 만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느낀 절망감과 허무함, 거기서 이끌어진 공허는 내 정신을 갉아먹고 나 자신까지 좀먹게 했다.

그쯤 동기들이 여럿 들어왔다. 친해지는 데에는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들 겁에 질려있었으니까. 몇몇은 결국 튕겨져 나가 다른 삶을 선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다른 삶을 용기 있게 결정한 그들이 신과 같아 보였다. 나는 그저 이 지옥을 탈출하려는 도망자였을 뿐이다.

'선생님은 매사에 당당해서 우아해 보여요.' 늦게 들어온 동기에게 들은 말이었다. 나는 그저 선배 간호사가 시킨 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반문하며 애써 부정했지만, 그 당시 생각해보면 나도 먼저 입사한 동기에게 느꼈을 대단함을 내게서 봤을 것이다. 겨우 한 달 차이지만, 무려 한 달 차이인 것이었다. 5월 동기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야 비로소,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서 '이익혜 간호사'라는 존재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수개월이 지나고 신규 동기들 모두가 독립을 앞두고 있을 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다른 선생님들과도 농담하고 웃으며 함께 협동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바쁘다고 내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번을 위하여 미리 루틴 일들을 해놓는 것이 버릇이 되어갔다.

그래 나는 이 날을 위해 지금까지 버텼는지도 모르겠다. 독립한 후에도 여전히 무의식 속에서 자리하고 있던 교육전담 간호사에 대한 공포감과 불안함이 속절없이 녹아 내렸다. 나는 사랑받고 있구나. 정확하지 않지만 그날 정말 오랜만에 크게 울었던 것 같다.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우리 병동 사람들에게 그 곳에 가서도 잘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줄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하나의 섬과 같다. 지금은 안개 속에 있어 서로의 존재를 모르지만 안개가 걷히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나와 같은 섬들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섬들이 모여 솟구쳐 오르는 날, 그것은 대륙을 이뤄낼 것이다.
 

이익혜 건양대병원 55병동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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