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범 건양대병원 홍보실장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텅 비어 있는 중환자실 앞 대기실은 원래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다. 하지만 수십 명이 모여 있어도 별로 시끄럽지는 않다. 누구 하나 편하게 앉아 큰 소리로 떠들거나 웃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조용히 뭔가를 생각하는 사람, 눈을 감고 기도하는 사람, 서로를 위로하는 사람 아니면 그저 멍하니 닫힌 병실 문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대기실 맨 앞자리 구석의 노란 소파에 앉아본다. 가죽이 헤지고, 스프링이 꺼진 소파에 앉아보니 이 자리에 수많은 사연이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오래전에 이 자리를 매일같이 지키던 한 아이의 엄마가 생각난다. 5월의 어느 날이었다.

"15살 환자가 폐렴으로 응급실 통해서 입원했습니다." 병실을 지키던 레지던트가 보고해왔다. "15세?" 보통 호흡기내과로 입원하는 분은 성인, 특히 노인이 대부분이어서 다시 한번 나이를 확인했다. "네, 중 3입니다." 외래진료실에서 차트와 검사 결과를 살펴보니 흔히 보는 평범한 폐렴이었다. 환아에 대한 보고를 다 듣고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병실에서 만난 아이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고 옆을 지키고 있던 아이의 엄마는 안절부절못했다. 불안과 걱정을 겨우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아이의 증세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만 시간 순으로 정렬해 얘기하는 엄마를 보니 충분히 이성적인 분 같았다. 여러 병원에서 심하지 않으니 입원할 필요도 없다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본인이 볼 때 아이가 너무 달라져서 걱정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사진이나 혈액검사는 심하지 않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청진기를 아이의 등에 대보니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 정도로 심한 소리는 처음이었다. 폐렴의 범위는 작았지만, 폐 경화가 매우 심한 것이었다. 아이의 엄마는 청진기와 엑스레이 없이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의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처방을 지시하면서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젊은 환자들의 회복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날 가슴 사진은 조금 더 나빠졌다. 느낌이 싸했다. 필요한 물건을 챙기러 간 엄마를 대신에 아빠가 간병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황을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았다. "가슴 X선 사진이나 혈액검사는 심해 보이지 않지만, 아이의 폐렴이 너무 심합니다. 여기서 호전이 없으면 중환자실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침착하게 설명을 듣더니만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더니 이내 다리 힘이 풀려 버렸다. 과거 나의 아들도 심한 폐렴과 천식으로 여러 번 입원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보호자의 심정을 잘 짐작할 수 있었다.

입원 셋째 날, 아이는 눈을 뜰 힘조차 없었고 산소 수치도 떨어졌다. 중환자실로 이송하고 수면제를 투여하며 인공호흡기를 연결했다. 보호자 부부는 한시도 중환자실 앞을 떠나지 않고 울면서, 서로 위로하면서 애타는 시간을 보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 말고는 아무 것도 중요한 게 없다고 했다. 소위 좋은 직장도 미련 없이 관두고 중환자실 앞을 지켰다. 낮이고 밤이고 이 노란 소파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폐렴은 점점 심해지고 급기야 에크모(ECMO)에 의지하게 됐다. 여러 병원의 내과 전문의와 소아과 전문의, 중환자 전문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만한 게 더 있을지 자문했지만, 회복이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여러 번 심장이 멈추고, 위기를 알리는 CPR 방송이 밤낮으로 울렸다.

위태로운 생의 끝자락에서 아이를 놓치지 않기 위한 사투가 이어졌다. 아이의 엄마는 더는 울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아이 곁을 지켰다. 아이의 심장이 멎으면 자기 심장이라도 주겠다는 부모의 호소에 고개가 숙여졌다. 위기의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많은 의사의 예상과 달리 아이는 부모의 바람대로 건강하게 퇴원하게 됐다. 퇴원하는 그들을 멀리서 바라봤다. 아이의 엄마는 빗질도 하지 않고 입술도 바르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환한 웃음으로 딸을 바라보며 한여름 따뜻한 햇볕을 향해 두 손 꼭 잡고 걸어나가고 있었다. 엄마는 아이를 단 한 순간도 놓은 적이 없었다.

정인범 건양대병원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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