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시장에서 노인의 앞 판자 위에 놓인 꽃신을 보다가 오고 또 오곤 했다`라는 문장이 내 마음 속에서 뒤척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김용익의 단편소설 `꽃신`의 첫 대목이다. `그래도 나는 시장에서 아낙의 앞 판자에 놓인 잘 다듬어진 대파 한 단을 눈여겨 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바꾸어도 좋겠다. 그래서 친근했는지 시장이라는 동일한 공간이어서 그랬는지 아무튼 그 야채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시장 초입에 서면, 저만치 싸전 건너편으로 이웃한 자그마한 곳. 난전의 노점상이 아닌 버젓히 시장상인으로 등록한 ?호 S가게이다. 여주인장의 낯빛은 소박하고 맑았다. 좌대에 진열해놓은 품목들의 배치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동일 종목을 다루는 주변의 적극적인, 예를 들어 땟깔 좋은 걸 앞으로 내어놓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적재해 놓은 진열대의 풍성함에 견주어, 빈자리가 느껴지는 단촐함이 그러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또 그렇게 해가 바뀌자, 그러한 무던함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워졌다. 자연히 나는 그 언저리에 다가서면, 보폭을 늘이며 펼쳐놓은 먹거리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시골집 텃마루 같은 좌대에 제철 푸성귀들은 친정 텃밭을 떠오르게 하는 한 폭의 그림인 듯 정겹게 다가왔다. 다보록히 엉겨 냉이 뿌리를 감싸는 흙내음조차 달근했다. 잘 다듬어 놓인 미근한 대파 묶음, 진초록의 그늘을 간직한, 맘껏 싱싱한 근대의 넓은 잎새는 줄기조차 씩씩했다. 이들을 키워낸 손길 닿은 시간이 절로 떠올랐다. 직접 기른 것들이에요, 라고 말하는 주인장의 경작지는 과연 어느 만큼의 넓이일까? 주인의 재바른 발소리를 기억할 밭고랑에서는 사철 푸른 것들이 살아, 연신 수확물을 내어주는 게 아닐런지… 마음자리의 멍석을 펼쳐놓고, 노동의 수고를 헤아리게 되었다.
지난 해 늦여름에서 첫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나는 순둥한 호박잎에 꽂혔다. 무농약 자연산의 참맛을 알게 되어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장바구니를 챙기곤 했다. 어느 날 파장 무렵의 매진이 아쉬워 내 번호를 주었다. 여기, 010-, 이름은 `호박잎`으로 저장하셔요, 제 얼굴 같지요? 딴에는 친한 척을 하자, 취나물 내음이 감도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연락을 주겠노라고 했다. 번호가 친구 추가 되고, 자연스레 뜨는 이름에 마음이 환해졌다. 온순(溫純, 溫順; 한문은 글쓴이 임의), 아, 이름 값을 떠올리며 안도했다. 프사에 나란히 따라붙은 글귀가 있다. `오늘 다시 오지 않으니 후회없이 살자`
`온화하고 단순하게 또는 따듯하고 순함`에 더한 정직한 그녀의 손길이 머잖아 거둬들일 호박잎을 기다린다. 하인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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