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미국인 친구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그녀는 보스턴에서의 삶을 접고 인도 방갈로에 명상센터를 열었다며, 내게 시간이 나면 꼭 한 번 오라고 했다.

나는 호기심에 차서 그녀가 알려준 웹사이트를 열어보았다. 웹 사이트를 열자 마자 초록색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셨다. 어디선가 사랑하는 이의 숨결 같은 바람이 불어왔고, 내 앞에 펼쳐진 화면은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처럼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자유로 충만했다.

웹사이트에는 계절별로, 시간별로 또 그룹별로 받을 수 있는 다양한 치유프로그램이 있었다. 숙식을 함께 제공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원격으로 상담을 받는 것도 있었다.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누구나가 여건만 된다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그런 명상센터였다.

수피주의(이슬람교 신비주의로써 내면에 이미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 하에 수행 즉, 요가, 명상, 춤, 의식 등을 통해 신을 구하는 종교)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이제서야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가서 그 동안 쌓인 삶의 스트레스를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불현듯 그녀의 삶이 부러워진 나는 그녀에게 메일을 썼다.

"나는 매일 아침 무거운 몸으로 일어나, 물 한 모금 마실 여유도 없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자는 아이를 들쳐 업고 유치원에 데려다 준 후,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해서,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치여가며 일을 하다가, 퇴근시간이 되면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내일로 미루고, 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 다시 아이를 돌봐야 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요가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산책을 하고, 몸이 노곤해지면 오수를 즐기다가, 햇살과 바람 속에 앉아서 책을 읽고, 다시 요가와 명상으로 네 안을 들여다보며 사는 네 삶은, 하루하루는 얼마나 값지고 보람 있는가. 그러다 보면 언젠가 너는 네 안의 진짜 너와 만날 수도 있겠지.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너처럼 살고 싶다…..."라고.

내 메일을 읽은 그녀에게 바로 회신이 왔다.

"내가 생각할 때는 너야말로 진짜 삶을 사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늦은 나이에도 아이를 낳아 기르며,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아.직.도 건실하게 버티며 꿋꿋이 살아가는 네 삶이야말로 내게는 진정한 삶처럼 보인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결국 현실에서 도망쳐 나왔고 - 사회 부적응자이고,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았지만, 미래가 없는 내가 너보다 더 불안한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언제 땅으로 뚝 떨어질지 모르는 구름 위에 앉아 있고, 언제든 마음을 놓친다면 쉽게 절망 속으로 빠질 수도 있다.

통장의 잔고가 줄어들 때 마다, 넓은 센터에 나 혼자만 앉아서 명상을 할 때마다, 나는 지금도 내 선택이 옳은가에 대해서 갈등하고 또 고민한다. 또한 이 갈등이 언제 끝날지는 나도 모른다."

그녀의 메일을 읽은 나는 어떤 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보기엔 내 삶이 값진 삶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그녀의 삶이야말로 이상적인 삶이라 생각되었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영원히 그녀처럼 살 수는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언제 다시 사회로 돌아 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그녀의 선택을 오랫동안 영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화면을 닫으며 곰곰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상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고. 결국 모든 문제는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쁘다, 얽매어 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도 결국 내 마음에서 터져 나온 함성이었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모처럼 집 근처 산에라도 가서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 심호흡을 하며 내 안의 나를 다독여 주어야겠다. 일상에서 가끔 나를 탈출시키는 것이 지금은 내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휴식이기에. 심옥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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