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옛부터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고 귀 기울여 들으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가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생각에 쉽게 마음을 열고 듣지 않는다. 이미 갖고 있는 사물관과 형성된 가치관이 견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싫든 좋든 간에 서로 감정을 교류하고 상호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일찍이 시인 정현종은 `섬`이라는 시를 통해 단절된 인간관계와 사람 사는 세상의 불통의 벽을 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했다. 물리적인 공간에 함께 있다고 해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집에 살면서도,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지 않으면 정현종 시인의 시에서처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단절된 관계의 지평을 열고 이청득심(以聽得心)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경청(傾聽)에 있지 않을까.

인간은 깨어 있는 시간의 50-80%를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보내고 그 시간에 적어도 45%는 듣는데 쓴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오감은 부지불식간에 원하는 것만 인지하며 매우 주관적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소음들을 걸러낼 수 있고, 무수히 많은 시각적 요소들을 적절히 차단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그 속성에 있어서 경청(輕聽)과 경청(傾聽)의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인간관계에 관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데일 카네기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비결은 잘 말하는 솜씨가 아니라 잘 들을 줄 아는데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효과적인 경청을 위해 상대방의 이야기에 적절히 공감하고 반응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것은 수동적 자세이며, 듣는 태도에 오감을 사용해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은 능동적 경청이라고 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 그것이 맞는지 틀린지 속으로 판단하며 반응 없이 듣기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음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듣기만 하면 미리 판단하고 상대방의 말에서 부정적인 것, 비판 적인 것, 불쾌한 것부터 귀에 들어 올 수 있다. 자녀와 부모의 대화에서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직원과 상사의 대화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게 된다.

경청을 통해 자녀의 마음을 얻고,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 직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는지, 더 나아가 시민과 지자체, 정당과 정당 간, 국민과 중앙정부는 얼마나 경청하고 소통하고 있는 지 되돌아보며 서로를 추스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소통과 관련한 많은 강연과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조신영의 `공감`이라는 책에 소개된 `경청`에 대한 한자어 풀이는 매우 인상적이다. 들을 청(聽)자의 부수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귀 이(耳)자 밑에 임금 왕(王)자가 있고, 오른 쪽에는 열십(十) 아래에 눈 목(目)자를 옆으로 눕혀놓고, 그 밑에 한 일(一)자와 마음 심(心)자가 차례로 놓여 있다. `열개의 눈과 하나의 마음`이라는 부제에서처럼 듣는 다는 것은 왕과 같은 귀, 즉 매우 커다란 귀를 갖고 집중해서 마음의 눈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경청은 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입으로 손으로 표현하며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단어 하나 하나에 시시비비를 가리기 이전에 상대방이 지금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하는 지를 간파해야 한다. 시쳇말로 "오죽하면 그랬을까"하는 공감이 필요하다. 사실 상대가 원하는 것은 조언보다 먼저 공감을 원한다.

경청이 부재한 사회는 소외감과 박탈감으로 우울과 무기력에 빠질 수 있다. 형식적으로 가볍게 듣고 지나가는 습성을 버리고 진지하게 더욱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정에서는 자녀와 부모, 부부간의 갈등을, 직장에서는 직원과 상사와의 불협을 비롯해, 국가적으로는 국민과 정부의 소통 부족의 우려까지 슬기롭게 극복하고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고 감싸는 사회로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미리 정해놓은 목표를 위한 경청(傾聽)의 과정으로 쓰여지는 경청(輕聽)으로는 동서고금을 통해 어려운 과제를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없었기에 진정 경청(傾聽)의 자세와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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