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가 일곱 살일 때 그의 집을 지나가던 채제공이 대문에 써 붙인 `입춘대길(立春大吉)`이란 글씨를 누가 썼는지 물어보고는 그의 아버지에게,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서 이름을 떨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해 질 것이니 절대로 붓을 쥐게 하지 마시오. 대신에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귀하게 될 것입니다"(인물한국사)라고 하였다 한다.

김정희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4번이며 별칭은 예술가 또는 개인주의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시기와 불굴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높은 수준의 성공을 이루어 내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 시기는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예민하며 시기심과 고통을 자주 느끼지만 내면화한다. 자신의 어려운 상황에 대하여도 불평하거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혼자서 견딘다.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충남 예산에서 병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로 월성위에 봉해질 정도로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였다.

그러나 그의 청년기는 순탄치 못한 삶의 연속이었다. 십 대 초중반에 조부, 양부, 친모의 죽음을 겪었고 스무 살 때에는 결혼 6년 만에 부인과도 사별했다. 이어서 스승인 박제가도 타계했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4유형인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의연했다.

1809년(순조 9)에는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는 부친을 따라가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 완원 같은 유명한 유학자들을 만나 교류했다. 이때 고증학을 배워 실사구시의 학문체계를 구축했다.

"연경학계의 원로이자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였던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에 놀라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 찬탄했고, 완원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애정어린 아호를 받았다"(인물한국사).

그는 이들로부터 경(經)학과 금석(金石)학·문자학·음운학·천산(天算)학·지리학 등의 영향을 받았고, 1816년에는 금석학을 바탕으로 북한산의 석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4유형의 특징 중 하나로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예술성을 보인 그가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친 배경에는 벼룻돌 열 개와 붓 천 자루를 소모할 정도의 노력이 있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0여 년간 여러 요직을 거쳤다. 1839년(헌종 5)에는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이듬해 당쟁에 휘말려 9년간을 제주도 유배지에서 보냈다. 1851년에는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야 할 정도로 벼슬생활에는 굴곡이 많았다.

4유형인 그는 제주도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마와 그리고 쓰는 일을 쉬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국보이자 조선 시대의 걸작인 세한도(歲寒圖)는 이 시기(1844년)의 작품으로 `의리를 잊지 않고 곤경에 처한 옛 스승에게 정성을 다함`을 칭송하며 그의 수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보낸 것이다. 유명한 추사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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