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8년(태종 18) 6월 초 수 차례의 경고에도 세자(양녕대군)의 일탈이 그치지 않자 태종은 마침내 세자 폐위 의사를 밝혔다. 의정부 대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료들도 즉각 동조 상소를 올렸다.

이때 이조판서이던 황희는 "폐장입유(廢長立幼;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는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이옵고 또 세자가 비록 미쳤다고 하오나 그 성품은 가히 성군이 될 것이오니, 치유에 주력하시기 바라옵니다"(인물한국사)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이 일로 4년여 세월을 남원의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다.

황희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9번이며 별칭은 조정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나태와 참여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소속된 집단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며 조화를 위하여 갈등을 회피한다. 관대하고 이타적이며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사심없이 일한다. 집단과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1363년(공민왕 12)에 개경에서 출생한 그는 138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고려가 멸망하자 은둔생활을 하다가 1394년(태조 3) 태조의 권유로 성균관학관을 시작으로 직예문춘추관·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언관 신분으로서 몇 차례의 소신 발언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다가 경기도도사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에는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되었고, 승정원 소속의 좌부대언과 지신사(도승지)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는 1422년(세종 4) 남원의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다시 조정의 요직을 거치면서도 사안을 가리지 않고 특유의 소신과 포용력을 보였다.

자신의 아들이 호화스런 집을 새로 짓고 권세가들을 불러 잔치를 하자, "`선비가 청렴하여 비 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는지 의문인데, 거처를 이다지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주고 받음이 성행치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나는 이런 궁궐 같은 집에는 조금도 앉아 있기가 송구스럽구나`라고 하면서 음식도 들지 않고 즉시 물러갔다"(인물한국사).

1430년(세종 12) 좌의정일 때는 제주 감목관 태석균이 관리소홀로 말 1000여 필을 죽게 한 죄를 받게 됨에 선처를 건의하였다가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세종은 일단 파직한 뒤 10개월 만에 영의정으로 승진시켰다.

19년간 영의정을 지냈으며 87세에도 영의정이었던 그가 자주 사임을 청해도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한 달에 두 번만 조회에 참가하고 어려우면 재택근무를 해도 좋다는 파격을 베풀 정도였다.

에니어그램 9유형이었던 그는 온유한 성격 탓에 사사로운 일로 문제를 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24년간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소신과 포용력에 기반한 그의 태도와 행위가 임금의 통치 방향과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1452년 그가 사망한 후 실록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관대하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신중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썼다"(인물한국사).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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