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이원익에 대한 기록이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몸가짐이 깨끗했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치적이 가장 훌륭하다고 일컬어졌다. 관서(關西; 평안도)에 두번 부임했는데 그곳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했다…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치사하고 금천으로 돌아갔다.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인조실록인조` 12년 1월 29일)`"(인물한국사).

이원익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과 경직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올바른 삶의 역할 모델이 되고자 하고 타인에게 잘못을 시정하도록 요구한다. 진리의 소유자로서 비판적으로 우월함을 과시하며 분노를 표출한다.

그는 1547년(명종 2) 이억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조부는 태종의 아들 익녕군 이치로 종친의 일원이었다.

22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외 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 관리를 시작으로 호조·예조·형조·사간원·홍문관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비교적 이른 나이인 35세에 동부승지에 올랐다.

"1587년(선조 20) 황해도 안주 목사일 때는 관찰사에게 양곡 1만여 석을 요청해 종자로 보급했다. 그의 노력과 순조로운 기상 덕분에 원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찰 정도로 풍작을 이뤘다. 안주는 양잠에 힘쓰지 않았는데, 이원익의 권유로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그를 `이공상(李公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군정도 개혁했다. 병사들이 1년에 4회 입번(入番; 당번 근무)하던 것을 6회로 고쳐 근무 기간을 석 달에서 두 달로 줄였고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인물한국사).

중년 이후에는 나라에 병란과 풍파가 계속된 만큼 그의 삶도 여기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안도 도체찰사, 평안도 관찰사 겸 순찰사직을 수행하며 명나라의 파견 장수 이여송을 도와 평양성을 수복하는데 기여했다.

정유재란 1년 전부터 조정의 무능과 편견, 왜군의 간계가 어우러져 이순신을 공격하자 그는 여론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적극 옹호하기도 했다.

광해군 조에서는 인목대비 폐위론에 극렬히 반대하여 유배되었다.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영의정으로 임명되었지만 광해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며 인조를 설복해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번 유형인 그는 세 왕조에서 걸쳐 다섯 차례의 영의정을 비롯하여 주요 관직을 수행하면서도 현안 사항에 대한 판단 기준은 늘 같았다. 그것은 옳으냐 그르냐 단 한 가지였다. 몇 번의 부침을 겪기도 했으나 그가 무려 57년 간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강직함 외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삶은 5월을 전후하여 그의 연고지에서 열리는 `오리문화제`를 통하여 재조명되고 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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