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4월 26일 이미 조령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별다른 기동력도 갖추지 못한 당시 상황에서 실로 엄청난 속도전이었다. 신립이 지휘하는 조선군도 충주 인근에 진을 치고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이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라고 하자, 신립은 `이 지역은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라고 했다"(`선수실록` 25년 4월 14일)(이덕일, 2007).

신립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6번이며 별칭은 충성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두려움과 강함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잘 인지되지 않는 내면의 두려움에 의해 추동되고 이를 다루기 위해 강력함을 우선시한다. 위협에 대하여는 공격적이며, 위기 대응에 자신의 능력이 가장 확실하다고 느낀다. 외부의 건의를 수용하고 굴복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1546년(명종 1)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무예 수련을 좋아하여 22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도총관·경력 등의 벼슬을 지냈고, 1590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한성부판윤에 이르렀다.

"그가 1583년(선조 16) 함경도 온성부사로 있을 때는 훈융진에 침입한 야인들을 격퇴하고 두만강 건너까지 추격해 그들의 소굴을 소탕했다. 종성에 쳐들어온 이탕개의 1만여 군대를 물리치기도 했다. 평상시에 철기(鐵騎) 500여 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켜 그 민첩함이 귀신같아 야인들이 모두 감복했다. 이 때 육진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용맹 때문이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규모 전면전을 수행해본 적이 없는 조선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졌다. 1년 전 통신사 황윤길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전쟁 수행 준비를 소홀히 한 조정은 선대 왕조 때와 비슷한 왜구의 노략질 정도로 판단했던 터였다. 부산진성에서의 첫 번째 전투 이후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사태는 급박해졌다. 조정은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임명하고 왜군의 주력을 방어할 최후 보루로 삼았다.

그는 조정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80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했으나 소수의 정예병을 제외하면 제대로 훈련된 군대가 아니었다. 북방에서 이미 용맹을 떨친 그였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왜군 장수 코니시의 1만 5000여 병력을 상대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생사를 가르는 전쟁터 그리고 두드러진 전력의 열세.그는 최고조로 상승한 심리적 기저의 두려움을 상대방에 대한 맞대응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6번 유형의 특성 중 하나인 공포대항형인 그는 지형이 험준한 조령에서 매복전을 펼치기보다는 탄금대의 습지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정면으로 맞붙는 길을 택했다. 전투 초기의 용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패였다. 그도 남한강에 투신 자결하고 말았다. 이후 왜군에게는 거칠게 없었고 개전 18일만인 5월 2일 한양에 무혈입성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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