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는 순종에 대하여 "독서광으로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 보학(譜學)에 밝아서 자신과 마주 앉은 사람의 본관과 이름만 듣고도 상대의 항렬을 알아내 몇 대 손인지 맞히고 그 사람의 직계 조상들까지 줄줄 읊을 수 있었다…궁녀가 순종에게 여러 이야기를 읽어주다 망국의 이야기가 실린 대목을 읽자 궁녀의 뺨을 치며 자신을 능멸하지 말라며 분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 국왕)"고 전한다.

순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4번이며 별칭은 `개인주의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시기와 경쟁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자신의 가치와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경쟁적인 방식을 취하며, 인정받지 못하면 시기에서 비롯된 분노를 나타낸다. 고통을 느끼면 외부로 투사하고 타인을 통한 욕구 충족으로 부정적인 감정에서 빠져나오고자 한다.

그는 1874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스물네 살이던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가 되었다.

1895년에는 모친인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고 자신은 그의 부친과 함께 감금되는 참상과 치욕을 겪었다.

"1898년 김홍륙이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그들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종은 커피의 맛이 이상함을 알고 곧바로 뱉었으나 순종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복용하여 치아가 모두 망실되고 며칠간 혈변을 누는 등 심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위키백과, 대한제국 순종).

그가 왕세자가 된 후 즉위하기 전까지의 대한제국(조선)은 쇠퇴기를 지나 노골화된 일본의 야욕 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형국이었다. 그의 삶도 여기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1907년에는 고종으로부터 대리청정을 위임받았다. 같은 해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등을 밀사로 파견한 일로 고종이 일본과 친일파로부터 퇴위 압력을 받자, 8월 27일 고종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는 실권없는 황제위를 유지하다가 1910년 일본제국으로부터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받았다. 이에 동의하지 않자, 8월 22일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대신 서명하였다. 그는 이렇게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합병되면서 왕조의 끝을 지켜보아야 했던 비운의 군주였다. 심지어 이왕으로 격하된 후인 1917년에는 도쿄를 방문해 일본 왕을 알현하도록 압박받았고 이를 이행할 수 밖에 없었다.

4번 유형이었던 그에게 자신의 대에서 벌어진 왕조의 멸망은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위에 있을 때나 퇴위 후 거의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런 고통을 외부로 표출하지 않고 내재화할 수 밖에 없었다.

"고종의 장례식 때는 양복을 입은 문상객이 오면 아예 등을 돌리고 절을 받지 않아 좌중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일본인 고관들까지 한복을 구해 입고 문상을 왔다는 증언이 있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 국왕). 그나마 그의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한 것이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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