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뜨드본에서 레드와인만 생산하는 뽀마르와 볼네 마을 아래로 이어지는 뫼르소(Meursault) 마을부터, 위쪽 꼬뜨드뉘에서는 땅 속 깊숙이 자리했던 석회암이 지표면으로 드러나면서 화이트 생산에 적합한 토양으로 변한다. 부르곤뉴 화이트를 대표하는 그랑크뤼 몽라셰(Montrachet, 민둥산)는 세계 최고의 샤르도네 화이트로 평가받는데, '몽라셰'를 마을 명칭에 붙인 2개 마을 퓔리니(Puligny)-몽라셰와 사샤뉴(Chassagne)-몽라셰 사이에 4개의 다른 그랑크뤼밭과 함께 위치한다.이들 4개 그랑크뤼 명칭에도 모두 '몽라셰'가
뽀마르(Pommard)는 '부르곤뉴 와인의 수도' 본(Beaune) 바로 아래 위치한다. 샤르도네의 화이트가 주류인 꼬뜨드본에서 예외적으로 뽀마르는 옆 마을 볼레(Volnay)와 함께 레드와인만 생산한다. 향과 색이 짙고 타닌과 알콜도 강한 스타일의 와인이라 '부르곤뉴의 보르도'라 칭해지는 뽀마르는 수 백년 전부터 영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부르고뉴의 가볍고 섬세한 다른 와인과 달리, 장거리 여행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부르기 쉬운 뽀마르라는 명칭은 꽃·정원·포도밭의 로마 여신 뽀노마(Pomona)에서 유래했다. 13세기에
부르곤뉴 와인의 수도 본 시내 북쪽에 본사가 위치한 메종 파트리야르슈(Patriarche) 뻬르에피스(Pere et Fils)는 지하에 부르곤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멋진 아치형 와인 저장고를 갖추고 있어서 매년 5만여 명의 관광객이 방문합니다. 직전 칼럼에서 소개해드린 메종 부샤르(Bouchard)에 관리자로 근무하는 삼촌을 따라 부샤르에서 와인업에 입문한 장-밥띠스트(Jean-Baptiste) 파트리야르슈가 1780년 와인유통업체를 설립했고, 프랑스 혁명으로 몰수되어 곡물창고로 사용되던 병자 봉사 수녀원 비지땅딘(Visitandi
부샤르(Bouchard) 명칭을 사용하는 부르곤뉴 메종은 2개가 있어 혼동을 유발합니다. 직물상을 하던 가문이 1731년에 볼레(Volnay)에 정착 후 와인 판매도 겸하면서 부샤르 뻬르에피스(Pere et Fils, 아버지와 아들)가 출범하였고, 2대째 장남 조셉(Joseph) 부샤르가 본격적인 네고시앙을 설립한 1750년을 시초로 삼은 4대째 장남 떼오도르(Theodore) 부샤르가 1828년 독립하면서 시작된 부샤르 에네에피스(Aine & Fils, 장남과 아들)가 있습니다.부르곤뉴에서 와이너리 역사가 가장 깊은 메종 샹피(C
와인 명칭 앞에 보통 샤또를 붙이는 보르도와 달리, 부르곤뉴에서는 소유한 밭에서 재배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도멘(Domaine)에, 매입한 포도로 양조한 경우 메종(Maison)에 제조사명을 붙입니다. 대부분의 부르고뉴 와이너리 명칭은 창립자 이름을 사용하는데, '메종'은 생략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부르곤뉴를 가장 잘 대표하는 메종은 라벨 상단에 포도주의 신 바쿠스(Bcchus)의 두상을 넣은 루이 자도(Louis Jadot)입니다. 웬만한 꼬뜨도르 마을 규모인 264ha에 달하는 포도밭을 아래 보졸레부터 위쪽 샤블리까지 곳곳에
와인지역 명칭 꼬뜨드본의 유래가 된 본(Beaune)은 꼬뜨드본과 꼬뜨드뉘를 합쳐 칭하는 꼬뜨도르(황금언덕)의 중심이기도 하면서, 나아가 전체 부르곤뉴 와인의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로서 '부르곤뉴 와인의 수도'로 대접받습니다. 다른 와인마을보다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인구(2만명)로 도시형태를 갖춘 본은 육상교통의 요지로서 부르곤뉴의 대형 와이너리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지명(본)은 마을이 형성될 때 중심에 위치한 우물의 이름 벨레나(Belena)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본의 포도밭은 꼬뜨도르에서 가장 큰 규모(414ha)입니다. 보
세계 최고의 샤르도네 화이트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꼬뜨드본 지역에서 유일한 레드 그랑크뤼 밭인 꼬르똥의 대부분은 꼬뜨드본 제일 위쪽에 위치한 알로스-꼬르똥 마을에 속합니다. '높은 장소'를 의미하는 켈트어 '알(al)'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 알로스(Aloxe)에, 꼬뜨드뉘의 즈브레-샹베르땡이나 본-로마네처럼 그랑크뤼 밭 이름 꼬르똥(Corton)을 덧붙여서 1862년에 알로스-꼬르똥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알록스-꼬르똥으로 쓰이는데, 브뤼셀(Bruxelles)이나 오세르(Auxerre)처럼, 현지에서는 알로스로 발음합니다. 꼬
부르곤뉴 핵심지역 꼬뜨도르의 북쪽 꼬뜨드뉘가 세계 최고의 피노누아 레드와인을 만든다면, 남쪽 꼬뜨드본(Cote de Beaune)은 세계 최상의 샤르도네 화이트 와인으로 와인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꼬뜨드본은 꼬뜨드뉘보다 상대적으로 화이트 와인의 비중이 높습니다. 꼬뜨드뉘의 그랑크뤼 24개가 전부 레드와인인 반면, 꼬뜨드본의 그랑크뤼 8개 중 7개가 화이트 와인입니다.앞선 칼럼에서 소개드린 꼬뜨드뉘 마을들을 지나 '부르곤뉴 와인의 수도' 본(Beaune)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면, 바로 오른쪽에 밑을 바짝 자른 상고머리 같은
부르곤뉴의 핵심인 꼬뜨도르(Cote d'Or, 황금언덕)는 꼬뜨드뉘(Cote de Nuits)와 꼬뜨드본(Cote de Beaune) 2개 지역으로 구성되는데, 부르곤뉴 그랑크뤼 레드와인 포도밭의 대부분인 24개가 위치한 꼬뜨드뉘는 '부르곤뉴의 샹젤리제'로도 칭해집니다. 꼬뜨드본 명칭이 중심 마을인 본(Beaune)에서 유래했듯이, 꼬뜨드뉘도 아래쪽 최대 마을(주민 5,500명)인 뉘쌩조르쥬(Nuits-Saint-Georges)에서 가져왔습니다.꼬뜨드뉘의 다른 마을들과는 달리, 뉘쌩조르쥬에는 그랑크뤼 포도밭이 없습니다. 대신 최다인
본-로마네도 즈브레-샹베르땡과 샹볼-뮤지니처럼 원래 마을 이름 본(Vosne)에 그랑크뤼밭 명칭 로마네(Romanee)를 붙여서 만들어졌습니다. 본은 숲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9세기 말 쌩비방(Saint Vivant)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마을 주변을 둘러싼 숲을 포도밭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수도원 기록에 로마의 포도나무(vignes romaines)가 언급되면서 로마네가 포도밭 명칭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로마네 포도밭 규모는 176ha로 위쪽 마을 샹볼-뮤지니와 비슷합니다.본-로마네는 꼬뜨드뉘에서 가장 뛰어난
샹볼-뮤지니도 즈브레-샹베르땡처럼 마을 이름 샹볼(chambolle)에 그랑크뤼밭 뮤지니(Musigny)를 접미사로 붙여서 1882년 변경되었습니다. 이 마을은 비가 와서 개천이 범람하면 거품이 일면서 물이 끓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끓는 들판' 의미의 샹볼로 불렸었다고 합니다. 포도밭 규모는 177ha로 윗 마을 모레-쌩드니(135ha)보다 약간 크지만, 인구는 300여 명으로 더 적습니다. 그랑크뤼밭이 뮤지니와 본-마르(Bonnes-Mares) 2개뿐으로 다른 꼬뜨드뉘 마을에 비해 적지만, 샹볼-뮤지니는 웬만한 그랑크뤼보다도
모레-쌩드니(Morey-Saint-Denis) 마을은 꼬드드뉘의 대표격인 즈브레-샹베르땡과 샹볼-뮤지니 사이에 위치합니다. 폭이 1km 남짓하고 거주민이 700여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로, 그랑크뤼 밭들을 포함해도 보르도의 대형 샤또 1개 수준인 약 140 ha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5개 그랑크뤼 밭과 20개 프르미에크뤼 밭의 비중이 약 60%(예외적인 부조 마을을 제외하면 꼬드드뉘의 최고)에 달할 정도로 훌륭한 와인들을 생산합니다. 마을 역사가 신석기 시대까지 올라가고, 마을 이름 모레는 로마시대의 Moricum에서 유래했다고
행정구역 이름이기도한 꼬뜨도르의 도청소재지 디종을 기준으로 하면 15km 아래에 위치한 즈브레-샹베르땡(Gevrey-Chambertin)부터 꼬드드뉘의 그랑크뤼 마을이 시작됩니다. 샹베르땡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명언을 남긴 나폴레옹이 즐겨 마신 와인입니다. 나폴레옹은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샹베르땡 와인을 챙겼고, 모스크바를 점령하고서도 크렘린 궁에서 샹베르땡 와인으로 축배를 들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것도 샹베르땡 와인을 공급받지 못해서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나폴레옹의 사전에 있는 와인은 샹베르땡뿐이었
보르도가 와이너리(샤또)를 대상으로 등급 와인을 지정한 것과는 달리 부르곤뉴에서는 샹파뉴처럼 포도밭에 등급을 매겼습니다. 꼬뜨도르에는 최고 등급인 그랑크뤼 포도밭이 31개가 있는데, 남쪽 꼬뜨드본에 7개(주로 화이트), 북쪽 꼬뜨드뉘에는 24개(모두 레드)가 그랑크뤼 등급을 받았습니다.대규모 샤또를 운영하는 보르도와는 달리, 부르곤뉴에서는 동일 명칭의 포도밭을 작은 단위로 나눠 소유하기에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가 따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들면, 부르곤뉴의 2번째로 큰 규모(50㏊, 보르도 중대형 1개 샤또 수준)의 그랑크
작년 11월말 파리 출장에 이어 주말 휴일과 휴가를 연계해서, 부르곤뉴의 핵심 지역인 꼬뜨도르(Cote d'Or, 황금언덕) 와이너리 투어를 했습니다. 꼬뜨도르는 부르곤뉴의 유명한 마을 대부분을 포함하는 꼬뜨드뉘(Cote de Nuits), 꼬뜨드본(Cote de Beaune)의 2개 지역으로 구성됩니다.꼬뜨드뉘 지역에서는 세계 최고가 와인을 생산하는 로마네-꽁띠(Romanee-Conti)가 위치한 본-로마네(Vosne-Romanee) 마을부터 샹볼-뮤지니(Chambolle-Musigny)를 거쳐 나폴레옹이 즐겨 마신 즈브레-샹베르
영화 카사블랑카의 명대사 "당신 눈동자에 건배!"로 유명해진 멈(Mumm)은 프랑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샴페인이라서 애초에 샹파뉴 와인너리 투어 대상으로 삼지 않았는데, 렝스 미술관 부속으로 북쪽에 있는 소성당 후지타(Foujita)를 찾아보러 갔다가,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멈 하우스를 덤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1920년부터 멈 하우스의 이사진에 참여하였고 1935년 사장이 되어 50년간 멈 하우스의 발전에 기여한 르네 랄루(Rene Lalou)의 친구인 일본 태생의 화가 레오나르도 후지타는 1966년 멈 소유지에 멋진 벽화
제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샴페인 병은 '샴페인의 꽃'으로 불리는 페리에 주에(Perrier-Jouet)의 벨에뽀끄(Belle Epoque)입니다. 불어 벨에뽀끄는 '아름다운 시대'란 의미로, 19세기 말부터 1차세계대전 전까지의 풍요와 평화의 시기를 뜻합니다. 1902년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Emile Galle)가 아네모네 꽃을 아라베스크풍 아르누보 형식으로 디자인한 것을 뒤늦게 발굴해서, 1964년 빈티지에 입혀 1969년에야 출시되었습니다.페리에-주에는 1811년 삐에르-니꼴라 페리에가 결혼 직후 부부의 이름으로 창립하여, 샴
샴페인의 역사에 돔 페리뇽만큼이나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마담 클리코( Clicquot)입니다. 1805년 27세에 과부(Veuve/뵈브)가 되어 평생을 샴페인 제조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1810년 최초의 빈티지 샴페인, 1816년 현재의 크리스탈처럼 맑은 샴페인 생산을 가능케한 리들링 테이블 발명, 1918년 최초의 블렌딩 로제 샴페인 등 혁신을 이끌어, 라 그랑드 담(La Grande Dame, 위대한 여인)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뵈브 클리코는 1909년 렝스 남동쪽에 위치한 쌩니캐즈(Saint-Nicaise) 언덕의 482개 크
샴페인의 국제적 상업화에 기여한, 배럴로만 유통되던 와인 중에 샴페인만의 병 유통을 허가한 1728년 '샴페인 칙령'을 내린 황제를 헌정한 와인 '루이 15세'를 플래그쉽 와인으로 삼은 드 브노쥬(de Venoge)는 1837년 스위스 귀족 가문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1864년에는 네덜란드의 왕자의 디켄팅 취향에 맞춘 로코코 스타일의 까라프(Carafe, 물병) 형태의 샴페인 병을 만들어 프린스 시리즈가 탄생됩니다.샴페인의 수도 에페르네의 샹파뉴 대로 한복판에 자리잡은 드 브노쥬 매종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속합니다. 1899년 페
이전 칼럼에서 소개해드린 까나르-뒤센느와 모에-샹동 등 대형 하우스(NM)들은 직접 재배한 포도보다도 더 많은 양을 재배업자들로부터 사들여 샴페인을 제조합니다. 샹파뉴의 전체 포도 재배면적은 3만3500ha입니다. NM들이 소유한 면적은 1/10인 3500ha 정도뿐, 나머지 90%는 약 2만명의 재배업자들의 소유입니다. NM에 포도를 팔던 이들 중 직접 샴페인을 만드는 재배업자들이 점차 늘어나서 현재 2000여 개의 하우스(RM)들이 전체 생산량의 1/4에 달하는 개성적인 샴페인을 출시합니다.샹파뉴 핵심 3대 산지 중의 하나인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