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폐망의 길을 걸었던 고구려를 계승해 228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광범위한 영토를 지배했던 발해는 우리나라의 역사의 맥을 지켜온 또 다른 축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 후인 서기 698년 대조영은 당나라가 쇠퇴해진 틈을 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 세력을 규합해 발해를 건국했다. 건국 당시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겠다고 천명하는 등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대·내외에 선포했었다. 이를 입증하듯 발해는 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영토 확장에 나서 옛 고구려의
그 옛날 만주 일대를 호령했던 고구려인들의 늠름한 기상과 숨결을 접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천 국제여객터미널을 출발해 17시간의 지루한 항해 끝에 내린 중국 대련에서 버스로 5시간 정도 달려 북한과의 접경지역인 단동으로 간 뒤 이곳에서 다시 4시간을 더 가서야 고구려 역사가 시작된 환인현을 만날 수 있었다. 환인의 도심 번화가를 10여분 벗어나자 저 멀리에 우뚝 솟은 바위 절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최초로 쌓은 성이다. 졸본성은 BC37년부터 국내
논산시 노성면에는 충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명재(明齋) 윤증(尹拯)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명재 윤증은 조선 유학사에서 예학을 정립한 대학자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가 죽은 뒤 조문 인사가 무려 2300여명에 달했다하니 당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숙종실록’은 윤증을 스승을 배신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숙종실록 편찬을 주도했던 노론계 인사들이 윤증을 왜곡한 탓이다. 윤증은 노론의 반대편에 있던 소론의 영수였다.조선 유교의 주류였던 기호유교는 바로 윤증의 손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노소 분당은 조선의 지배 철
‘충청도’하면 ‘양반’을 떠올릴 만큼 우리 지역과 양반문화는 밀접한 관계다. 이를 잘 활용할 경우 경북유교문화단지와 같이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평가다.충남의 대표적 ‘문화브랜드’인 기호유교를 현대에 맞게 활용할 방안에 대해 공주대 사학과 이해준 교수에게 들어봤다.- 기호유교를 현대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우선 기호유학의 특징을 대중에 정확히 인식시켜야 한다. 유교에 부정적 인식이 많다. 양반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양반과 선비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나쁜 이미지만 확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등재를 위해서는 왜곡된 백제 역사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패망’과 ‘잃어버린’ 백제가 아닌 한때 동아시아 역사를 주도했던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다.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한 스토리개발과 ‘진정성’ 확보도 백제 역사가 바로 선 기반위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백제유적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앞서 바로잡아야 할 백제 역사에 대해 알아본다.◇ 교과서부터 다시 검증해야= 백제사를 전공한 전문가들은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부터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인다. 국사 교
백제역사를 일반대중에 홍보하는 방법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학계를 중심으로 인터넷과 스마트 폰 기술을 사용한 ‘백제시대 전자문화지도’ 만들기 사업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공주대학교와 한국디지털정책학회는 최근 공주대에서 ‘백제시대 전자문화지도 개발방안’ 국제포럼을 개최했다.이 자리에서는 국내외 학계에서 역사와 IT 전문가들이 참석해 백제시대를 디지털화해 웹과 모바일상에 재구성하는 작업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됐다.전자문화지도란 방대한 역사 문화정보를 시간과 공간, 주제에 따라 입체적으로 구성해 지리정보와 사진
지난 2월 공주·부여 백제역사유적지구가 문화재청으로부터 세계문화유산 우선등재 추진대상으로 선정됐다. 이에 따라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는 빠르면 2-3년 안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본 등재를 시도하게 된다. 이 기간 안에 충남도와 문화재청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준’에 맞게 유적 정비를 마쳐야 한다. 길지 않은 시간이다. 더욱이 익산 역사유적이 공주·부여 역사유적과 함께 세계유산 등재를 시도하게 됨으로써 풀어야할 과제가 하나 더 늘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강종원 연구위원으로부터 백제유산이 세계문화유산 본 등재에 성공하기
공주·부여의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적의 복원 및 정비를 위한 정부차원의 재정지원이 절실하다.유적지구의 규모가 방대하고 세계유산 등재까지 남은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유적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볼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동안 지원되던 문화재 정비사업 수준의 지원을 넘어 백제역사유적지구 전반을 손 볼 정도의 국가차원의 통큰 결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방대한 유적, 정부 지원 없이는 단기간 정비 힘들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가장 큰 영향을
공주와 부여를 백제의 고도다운 명품 역사문화도시로 가꾸기 위해 이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는 갖가지 문화재 복원사업의 주관부처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정부 부처별로 서로 비슷한 내용의 문화 사업을 따로따로 추진하며 백제역사유적 정비 사업에 혼선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공주와 부여에서 추진 중인 문화재 복원 사업은 크게 △백제문화권 문화유적정비(문화관광체육부 주관)사업과 △충남고도 옛 모습 가꾸기 사업(충남도 및 문화관광체육부 주관) △고도보존사업(문화재청 주관) △백제문화권 문화유적정비사업(문화재청) 등 4가지다.문체부에서
공주·부여 백제역사문화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본등재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현지 주민들의 참여가 절실하다. 특히 전북 익산 백제유적지구까지 포함되면서 문화재청 중심의 세계유산 추진은 어렵게 됐다. 충남도와 공주, 부여, 전북 익산시 등 관련 지방자치단체가 똘똘 뭉쳐 도전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됐다.지차체 차원에서 백제 역사문화유적을 있는 그대로 유네스코에 알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세계 굴지의 역사유적지를 간직한 국가들과 겨루려면 시간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실타래를 푸는 건 주민들의 몫이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한 지역 주민들은 어떤 활동을 펼쳤을까? 경주와 중국 은허유적 사례를 통해 알아본다.경주에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유산이 3가지나 된다. 1995년 불국사와 석굴암이 국내 최초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한데 이어 2000년에는 경주역사유적지구가, 지난해에는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에 오르는 경사를 맞았다.특히 양동마을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현지 실사단이 마을을 방문했을 당시 주민들이 직접 마을의 유례와 중요성을 설명했
현재 국내에서는 유적의 복원에 부정적인 여론이 대체적인 반면 세계 각국에서는 유적의 원형을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기법을 마련해 복원에 나서고 있는 추세다.지난 200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한 중국의 은허유적이 대표적 사례다. 은허유적 왕릉지는 현재 지표보다 상당히 아래에서 유적이 발굴 됐다. 중국은 지표면에 유적의 형태나 유구를 표현하지 못하게 되자 발굴로 드러난 왕릉의 형태를 따라 낮은 관목을 심었다. 무덤의 형태나 범위를 일반인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말 무덤군 등 매장유적은 발굴조사 이후 복토를 하고 그
200여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백제의 수도로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백제와 부여. 그러나 과거의 찬란한 역사에 비해 현재 눈에 띄는 유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2600여 점이 넘는 부장품이 출토된 공주의 무령왕릉을 제외하곤 나머지 유적지는 밖으로 드러나는 볼거리가 부족 한 것이 현실이다.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백제 유적이 앞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본 등재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좀 더 체계적인 발굴을 통해 가시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백제유적= 백제유적이 신라와 고구려 유적과 비교해 남아있는 유적이 적은
충남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가 전북 익산역사지구와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가칭)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우선 등재 목록에 선정됐다. 잊혀졌던 백제가 대한민국의 자긍심으로 우뚝 서는 첫걸음을 내딛은 쾌거다.오는 2013년 세계유산 본등재를 위한 유네스코 실사와 평가에 앞서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백제 바로 보기’다.우리는 백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삼국시대의 한 축이면서 영화 ‘황산벌’에 나오는 나라 이상으로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백제 고도인 소부리(부여)를 가로지르는 백강(白江)을
부여읍에서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연못이 있다. 연못의 이름은 마래방죽이다. 방죽의 북쪽에는 마을이 있는데 마골(薯谷)이다.마을에는 전설이 하나 있다. 집이 가난해 어려서부터 마를 캐서 장에 내다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했다는 ‘마보(薯童)’라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전설은 마보가 태어나 자란 곳이어서 마골이 됐고, 그 어머니가 살던 집 앞의 연못이 ‘마보방죽>마 아해(아이) 방죽>마래방죽’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다.마래방죽이 바로 백제 별궁의 연못인 궁남지(宮南池)다. 마보는 백제 30대 왕인 무왕(武王)이다. 무왕의 출생설화에
선사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장구한 대한민국 역사 속에 남아있는 유적 유물 가운데 유독 백제 유적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지 못했다는 본보 보도(1월11일,12일,13일,14일,20일,21일,24일,25일,26일,27일31일,2월8일,9일자) 이후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가 지난 8일 문화재청 세계유산위원회로부터 세계유산 ‘우선 등재’ 추진 목록에 선정되는 결실을 맺었다.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는 앞으로 2-3년간의 준비 기간을 걸쳐 본격적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경쟁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게 된다.이번 우선 등재 선정은
공주·부역역사유적지구처럼 소멸한 왕조의 도시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례는 더러 있다. 인도 함피유적(1986년), 베트남 후에(1993년), 시리아 다마스쿠스 구 시가지(1979년)가 대표적이다.특히 인도 함피유적은 수도 기능과 함께 번영했던 역사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주·부여유적의 유력한 비교대상이다.함피는 6세기부터 힌두왕조의 성지였다. 1336년 비자야나가라 왕국의 수도로 인구 50만의 대도시였고, 1565년 무슬림에 정복되기 전까지 면화, 향신료 무역으로 번성했다. 도시 곳곳에 남은 남인도 드라비다양식의 사
공주·부여 역사유적은 찬란한 백제 역사 만큼 값지고 가치있다. 백제시대의 성곽과 사찰, 고분, 유물 등을 한데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는 노력은 이 때문이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유적, 유물은 세계적으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받았다. 고인돌 유적과 경주역사유적지구, 고구려고분군, 고려 팔만대장경, 조선 종묘·안동 하회 및 경주 양동마을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유독 백제 역사유적지만 빠진 건 인정하기 힘든 대목이다. 그렇다면 과연 고구려와 신라 유적들은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이 됐을까.세계
무령왕릉이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건 지난 1994년이다. 이후 백제사와 동북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만큼 세계유산에 등재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왜 안됐을까? 지난 2006년 발표된 ICOMOS 한국위원회의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정비 보고서’는 명확한 이유를 제시했다. 무령왕릉은 한국과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가치가 탁월한 것은 사실이나 세계유산의 보편적 가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왕릉이 아닌 공주박물관에 전시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해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 일원의 백제 유적지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려면 필요 충분 조건이 있다.먼저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를 인정받아야 한다. 유네스코는 오랜 시간 동안 또는 세계의 어떤 문화지역 안에서 일어난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계획 또는 조경 설계의 발전에 관한 인간적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문화적 전통, 또는 살아있거나 소멸된 문명에 대한 독보적이고 특출한 증거도 필요하다. 또 인류 역사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