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庭園)이라는 용어는 한자문화권에서 생겨나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동산의 뜰'이라는 뜻으로 쓰였고 일본에서 19세기 후반부터 보편화된 것이다.중국에서는 원림(園林)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 별서(別墅)는 저택에 인접한 경승지나 전원에 은둔하거나 자연을 즐기기 위해 조성된 정원의 일종이다. 대개 본가와 가까이 있어 자체적으로 간단한 취사와 기거를 할 수 있는 소박한 거처, 즉 오늘날 별장을 말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자연과 벗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성정을 함양했다. 별서와 같은 경치좋은 정원에서 계회(
최근 정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 고장에는 바보산수로 유명한 故운보 김기창 화백의 운보의 집이 전통공간의 배경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충북 청주시 청원구에 위치한 이 곳은 전통한옥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이 미스터션샤인, 내부자들, 제빵왕 김탁구 등 흥행을 거둔 작품의 무대로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그간 운보의 집에 관해서는 근대기 동양화가 운보의 명성, 아내 우향과의 사랑과 예술이 세간의 주 관심사였다. 그러나 운보의 집 조영과정을 자세히 아는 이는 드물다. 운보의 집
내가 하는 일은 건축문화재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건축문화재 연구는 오래된 건물을 실측하고 사진을 찍어 기록하고 그 특징을 조사하는 것으로, 그 대상이 되는 오래된 건물은 궁궐 등 몇몇의 건물을 빼면 주로 절에 많이 남아 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이 대전이니 대전을 비롯한 충청도 지역의 중요한 건축문화재를 소개하면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나,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등이 있다. 하지만 건축문화재를 연구하면서 개인적으로 내가 더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런 문화재적인 가치를 많이 갖고 있는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이들 건물이 있는 절로
꽃내음이 가득했던 봄이 지나가고 따스함을 머금은 여름 햇살과 바람이 다가온다. 어느새 5월이다. 5월의 푸른날, 오늘은 부여를 간다. 부여를 향하는 이정표를 따라 4번국도를 따라 시골길을 지나면 어느덧 부여의 초입이다. 사비도성(부여)에는 관북리유적, 정림사지 등 당시 백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사비도성의 진정한 지배자인 성왕은 538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면서, 백제 중흥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성왕은 이를 위해 안으로는 정치·경제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외교·전쟁 등 적극적인 확장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송산리 고분군은 우리에게 무령왕릉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백제 웅진도읍기 왕과 왕족의 무덤이다. 현재 송산리 고분군에 올라가보면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총 7기의 무덤이 정비되어 있으나 일제 강점기 조사된 자료를 조금만 찾아보아도 20여기 이상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1927년부터 시작되어 대부분의 무덤이 일제 강점기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그러나 정식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되거나 보고서가 간행된 자료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27년 송산리 고분군 조사는 일본인 輕部慈恩이
사찰, 궁궐 등 우리나라의 전통 목조건축물 표면에는 녹색, 적색 등 다양한 색이 다채로운 문양과 함께 칠해져 있다. 이러한 채색을 '단청(丹靑)'이라고 한다. 단청은 흔히 건축물에 회화적 아름다움을 표한한 수단인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지만 목조건축물의 수명 연장을 위하여 고대부터 발달해온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그 까닭은 건축물의 골격이 목재임에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목조건축물의 부재로 가장 많이 사용된 수종은 소나무로 알려져 있다. 소나무는 재질의 특성상 내구성이 우수하고 습기에 강하며 가공이 쉬운 장점이 있으나 표면이 거
옛사람 뼈는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언제 죽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질병을 앓고,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를 밝혀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고고학, 체질인류학뿐만 아니라 화학, 생물학, 해부학, 고병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옛사람 뼈를 연구하면서 과거의 생활상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축적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화학과 생명과학의 발달로 인해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전 세계적으로 DNA 분석과 안정동위원소 분석 연구 논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등 양적, 질적으로 크게
미세먼지로 인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 어디 좀 피할 만한 곳이 없을까? 문득 한 곳이 떠오르니, 공주시 사곡면 태화산에 위치한 천년고찰 마곡사다. 마곡사는 조선시대 지리서인 '택리지'와 예언서인 '정감록'에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열 곳인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산이 겹겹인데 흐르는 물이 맑아, 왜적은 물론 미세먼지도 지나갈 것 같다.마곡사는 다른 사찰과 사뭇 다르다. 첫째, 마곡사는 계곡을 경계로 둘로 나뉘어져 있다. 때문에 무심코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 석탑이 있는 북원(北院)으로 향하게 되고, 되돌아
우리나라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가옥은 현재 189건이다. 여기에 시도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전통가옥의 숫자를 더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전통가옥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지붕을 기와로 얹은 기와집, 볏짚을 쓴 초가집, 억새로 지붕을 덮은 샛집, 나무판이나 널찍한 돌널로 지붕을 덮은 너와집 등등. 그런데, 물길 위에 지은 집은 전국을 통틀어 단 세 곳에 불과하다. 하나는 구례 송광사의 우화각이고, 다른 하나는 곡성 태안사의 능파각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람사는 집이 아닌 '통행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사람이 사는 '집'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기획되고 있다. 때맞춰 최근 충청남도는 항일 지사인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의 초상화와 그를 체포해 일본으로 압송해 가는 장면을 그린 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조선말 관료였던 최익현은 기울어가는 왕조를 위해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절대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를 거듭해 올렸으며, 1876년 일본과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광화문 앞에 도끼를 들고 나가 '차라리 내 목
고려시대에도 그림책이 있었다. 1124년에 제작된 이 책의 이름은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송 나라의 사신(使臣) 서긍(徐兢)이 휘종 황제(1100-1125 재위)의 명을 받고, 1123년 고려를 다녀간 후에 작성한 일종의 보고서가 바로 '고려도경'이다. 우리가 보고서를 작성할 때,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이나 도면, 그래프 등을 첨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서긍은 이 보고서에 고려의 이모조모(궁궐, 복식, 풍속, 무기, 물건, 바닷길 등)를 열심히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서긍은 그림을 첨부하는 수
하이테크(High-Tech)는 고도로 발달된 첨단 과학 기술을 뜻한다. 현재도 그러하듯 이러한 첨단 기술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될 만큼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관리되고 외부로의 유출을 철저히 차단한다. 고대에도 이러한 기술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권력이 집중된 중앙에서 철저히 감독하여 정치적 혹은 외교적 차원에서 각 지역 엘리트들에게 적절하게 사용되었고 이는 특정 계층만이 향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하이테크가 적용된 고대 물품 중에는 백제(B.C.18~A.D.660)의 흑색마연토기가 있다. 흑색마연토기는 고구려, 백제, 신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해이기도 하지만 110년 전 국권이 피탈되기도 전인 1909년은 일본인들이 '조선고적조사사업'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문화정책을 벌이기 위해 우리 문화재에 대해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된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의 고적조사 내용과 실태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1909년 대한제국의 탁지부 촉탁으로 임명돼 고적조사를 위탁받은 세키노 다다시 일행은 9월 19일 한성에 도착해 21일 조사를 시작으로 12월 27일
2013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이후 사람들에게 방사선 관련 이미지는 건강과 안전에 대한 우려와 걱정에 대상이 되었고, 2018년 라돈 침대 사태는 방사성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과 경각심의 절정판이었다. 이러한 사고와 사건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관리돼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우주공간에서 지구로 들어오는 우주방사선과 암석에 포함된 우라늄, 토륨 등 지각에 포함된 지각방사선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방사선 선량을 지구의 1인당 선량을 평균했을 때 2.4 밀리 시버트(mSv)이나 인도의 케르알라 해변에서는
얼마 전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에서 낭보가 날아왔다. 문화재청과 수많은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한국의 산사 7곳 모두가 세계인이 보호하고 가꿔야할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렇게 등재된 세계유산은 총 1,092건에 이르고 있다. 이중에서도 암각화 유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 등을 인정받은 세계유산은 총 15곳에 이른다. 암각화라는 단일유적으로 보면 등재된 유적의 수가 생각보다 많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암각화는 그만큼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내포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역사적 인식을 연결시켜
1966년 불국사에서 삼층석탑(석가탑)을 보수하던 중 신라 경덕왕 때인 서기 751년 불국사가 중창될 때 봉안된 것으로 알려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조성된 지 1200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부식되고 산화돼 결실된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발견되어 한지의 보존성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한지의 우수성은 옛날 문헌기록에도 많이 언급돼 있다. 대표적으로 한치윤(1765-181년)의 해동역사와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에 잘 나타나 있다.그럼 이러한 한
조선후기 실학자인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에는 벽돌의 견고함에 대해 설명하는 박제가(朴齊家)의 대화에 다음과 같이 석회가 언급되었다. '벽돌은 석회로 붙이면, 마치 아교풀로 나무를 붙이고 붕사로 쇳덩이를 접착한 것과 같네. 만 개의 벽돌이 하나로 뭉쳐 아교처럼 하나의 성을 이루네.' 석회는 예로부터 건물이나 성곽, 무덤, 벽화 등 건축문화재 뿐만 아니라 예술품, 약재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심심치 않게 회(灰)라는 단어가 출현하여 석회의 쓰임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숙종실록'에는
문화재와 과학은 이제는 불가분의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예전에 고고학이나 미술사와 같은 인문학 연구를 중심으로 형태 분류나 문헌과 기록에 근거한 편년이 주로 이루어졌다면, 지금은 문화재 정보를 보다 더 정확히 알기 위한 과학적 조사를 당연시하고 있다.분석과학은 대표적인 문화재 과학적 조사로 금속, 석조, 도자기, 종이, 직물, 옻 등 다양한 재질의 문화재 성분과 함량 등 정보를 밝혀낸다. 과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분석기기가 그대로 문화재에 활용되어 우리가 눈으로 봐서 알 수 없는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절대적인
"괘불탱"은 사찰의 전각 내부에 봉안하는 불화와 달리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의 불화이다. 임진왜란 이후 대규모 천도의식이 활발히 개최되면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괘불탱은 야외 의식을 위해 대형이 필요했던 조선 후기 불교신앙의 특징으로 한국 불교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1900년 이전에 제작된 괘불탱은 국보 7점, 보물 47점, 시도유형문화재 10점 등 총 84점에 이르며 1622년에 제작된 보물 제1279호 죽림사세존괘불탱이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이 중 충청지역의 괘불탱은 총 14점
지난 2016년 9월 12일, 경북 경주에서 우리나라 지진관측 역사상 가장 큰 지진이 발생했다. 그 규모는 5.8로 TNT 폭탄 50만톤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매우 큰 피해가 발생할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과 같이 건물이 붕괴되거나 다리가 무너지는 등의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지진이 발생한 곳이 땅 밑 약 15km로 매우 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작년 11월 포항에서는 규모 5.4의 지진이 또 한 번 발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앞선 지진보다 더 큰 진동이 느껴졌고, 더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규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