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한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대덕특구본부장
윤병한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대덕특구본부장
펜싱 경기에서는 상대방을 찌르면 불이 들어와 누가 먼저 찔렀는지 쉽게 판정하는 장치가 있다. 중세시대에는 그런 전기장치가 없었을 텐데 어떻게 승패를 판정했을까. 워낙 빨라서 찌르는 사람도 잘 모르고 찔린 사람이 가장 잘 안다고 한다. 그래서 찔린 사람이 `투쉐(toucher)` 라고 외치면 점수를 매겼다고 한다.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지, 도덕성이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대전은 연구자가 많은 도시다. 그래서 대전에서 연구자의 투쉐 정신이 더 요구되는 것 같다. 현재의 연구 관리 시스템은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저런 위원회를 통해 과제가 선정되고, 연구업적도 정량적 지표에 따라 평가된다. 공정성과 투명성을 추구하는 대신 효율성을 손해 보는 시스템이다. 신뢰가 부족한 사회일수록 공정성과 투명성이 강조되는 결과일 것이다.

좁은 길을 운전하다 보면 수도 없이 넘어야 하는 과속방지턱을 만난다. 모든 시민을 잠재적 과속운전자로 취급하고 물리적인 수단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서글프다. 그런 면에서 연구계의 시스템도 과속방지턱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분명 이 방식이 최선은 아닐 것이다.

사업가는 사업가가 가장 잘 알고 연구자는 동료 연구자가 가장 잘 안다. 동료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연구자가 스타 연구자가 되면 시스템이 망가진다. 본인 전문분야도 아닌데 융복합 연구를 명분으로 다른 분야 연구비를 가로채가는 사람이 많다. 유행에 따라 들어온 이방인이 그 분야를 수 십 년 연구해온 전문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서로 불신과 반목이 쌓여간다.

우리나라는 예산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내용의 중복연구를 지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연구과제를 시작해 버리면 같은 내용으로 연구하기 어렵다. 물론 세부내용을 차별화해 억지로 비켜가기도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크다. 해당 전문가가 연구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발 빠르게 시작해 버려서 생기는 시스템적 허점이다. 앞으로 정부는 제안서 중심이 아니라 연구자 중심의 지원을 하겠다고 한다. 참으로 올바른 방향이다. 연구자별 과거 연구실적 관리가 중요해질 것 같다.

연구개발특구는 연구소의 연구결과를 기업에서 사업화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기업에게는 연구기관의 원천기술 개발자와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연구자에게는 본인 기술이 꽃을 피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연구자 중심의 연구지원이 잘 된다면 기업인이 공동연구 파트너를 찾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그만큼 더 많은 연구결과가 사업화에 성공하게 될 것이다. 연구개발특구도 특허 중심의 기술사업화에서 연구자 중심의 사업화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

한편, 기업이 정부지원 과제를 수행할 때 정부지원금을 인건비로 사용하지 못한다. 신규로 채용한 직원은 예외이고, 소프트웨어 개발같이 인건비 외에는 다른 예산이 필요 없는 과제인 경우에도 인건비로 쓸 수 있다. 기존 직원에게 인건비를 지급하고 실제는 다른 연구가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규정이 생긴 것인데 깊이 생각해보면 꼭 옳은 방법은 아니다. 신뢰사회가 된다면 정부예산을 인건비로 주고 연구자재를 회사 돈으로 사도 큰 틀에서 문제 될 것이 없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을 10회로 제한하는 제도가 도입된다고 한다. 특정기업에 지원이 몰리는 것을 방지하고,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는 기업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을 것 같다. 또한 신생 기업에게 기회가 많아지는 것도 긍정적 요인이다. 한편으로는 횟수 제한 때문에 대형 과제에만 지원이 몰리는 부작용도 예상된다.

연구계에서는 어떻게 하면 과속방지턱을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연구계 내에서 연구자간의 신뢰회복이 필요하고, 연구자와 정부간에 신뢰가 쌓여야 한다. 우리나라 연구의 심장부인 대덕연구개발특구에서부터 연구기관과 기업이 신뢰를 얻어 자존감을 높일 수 있기를 바란다. 펜싱 경기에서 진 사람이 투쉐를 외치는 것처럼 신뢰에 의해 작동되는 연구관리제도가 정착되길 소망해 본다. 윤병한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대덕연구개발특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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