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시대에는 천태산(天台山), 고려조에는 옹산(翁山)이라 불린 곳, 바로 계룡산이다. 산 주위에 갑사(甲寺), 동학사(東鶴寺), 신원사(新元寺) 등 스무 곳이 넘는 크고 작은 사찰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15개 봉우리가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 국토의 중심이자 민족의 정신이 응집되어 있다고 여겨져 온 계룡산은 고대로부터 종교와 문화의 성소(聖所)였다. 삼국시대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배되어 왔다. 백제 문주왕은 백제의 왕도를 금강 중류의 웅진(공주)으로 이동시켰는데, 이로써 계룡산은 국가적 정치·종교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백제를 복속한 신라에서도 계룡산을 오악(五嶽)으로 편제하여 숭배했을 정도였다. 고려 때는 무속의 성지로, 조선시대에는 소사(小祀)로 숭배된 민족종교의 성지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계룡산의 자연자원, 경관자원, 문화자원과 함께 주목되는 유산이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된 '계룡산 중악단'이다.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으로 의미가 각별한데, 현재 건물은 석조기단 위에 서남향으로 지은 건물로 1879년(고종 16년)에 재건한 것이다.

계룡산 산신제는 통일신라 이래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던 국가 차원의 산천제(山川祭)였다. 1394년(태조 3년)에 처음 산신제를 모셨는데, 중앙의 관리가 매년 2월과 8월에 계룡산 신원사에 파견되어 제의를 올렸다. 1651년 이후 폐지되었다가 1879년 명성황후가 재건하여 제사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악으로서의 계룡산 산신제의 위용이 더욱 높아졌는가 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승이 단절되고 말았다.

한국인의 자연관과 신앙관이 중층적으로 투영된 역사적 자산인 계룡산 중악단은 무속인들이 즐겨 찾는다. 이는 국가 차원에서 치제되던 명산인 계룡산신에 대한 지속적 믿음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계룡산 산신제는 한국인의 자연관과 신앙관이 중층적으로 투영된 역사적 자산이자, 지역의 정체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현대적 자산이기도 한다. 아울러 유형유산인 중악단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기능을 한다.

황경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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