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기 충남대박물관장·국사학과 교수
김상기 충남대박물관장·국사학과 교수
충남 공주시 금학동 견준산 기슭인 우금치 일대는 전봉준이 이끈 동학군의 격전지였다.

19세기 말 우리는 자주독립국가의 건설 이외에 자유와 민권이 보장되는 평등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조선왕조는 양반이 세습적 특권을 누려온 신분제 사회였다. 따라서 양반의 지배를 받는 서민과 천인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천주교의 전파에 자극을 받은 최제우는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사상을 중심 교리로 동학을 창도하였다.

동학은 특히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민간에 급속히 퍼져갔다. 1880년대 기독교의 포교가 묵인되고 교회당이 건립되는 상황에 동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892년부터 시작된 교조신원운동은 조병갑의 탐학으로 인한 고부민란을 계기로 동학혁명으로 확대되었다. 동학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동학군의 주장은 비록 왕권을 부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지만 탐학한 관리와 부호를 구축하자는 민중혁명적 성격을 띠었다. 정부 역시 동학군의 집강소 체제에 처음에는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청일 양국군의 출병으로 동학의 집강소 체제는 허물어졌다. 민씨 정권의 청군 요청은 정권 유지를 위하여 국가를 위기로 빠뜨린 대표적인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군이 들어오자 일본은 대병력을 파견하여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일제에 의해 친일내각인 김홍집 내각이 조직됨에 따라 고종은 허수아비가 되었으며, 조선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학군은 이러한 사태에 재봉기하였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반침략 항쟁을 전개한 것이다.

우금치 전투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이 공주의 우금치 일대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와 치렀던 혈전을 말한다. 공주는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여러 날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동학군은 큰 희생을 치르고 패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잔여병을 이끌고 가까스로 후퇴하였으나, 얼마 안 가 순창에서 체포되어 다음 해 사형에 처해졌다.

동학혁명은 비록 무능한 정부와 외세의 간섭으로 좌절되었지만, 이들의 정신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으로,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으니 한국 근현대사의 한 획을 그었다 할 수 있다. 전적지에는 1973년 11월 동학혁명위령탑을 건립하여 동학군의 넋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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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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